스포켄한인장로교회 이기범 목사
본문 : 요 21:15 ~ 23
제목 : 사랑의 회복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492주년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있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타락한 인간 영혼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Scripture)는 것입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요, 말씀으로 돌아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가 언제나 늘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Church must be reformed)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repent)하지 않으면 회복(recover)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1229년 발렌시아교회 회의를 통하여 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여 말씀의 암흑 시대를 초래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천국에 대한 말씀도 듣지 못한 채, 인간의 공로 사상에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성자들을 예수님처럼 떠받들었고, 그 결과 직업에 따른 수호 성자를 두기까지 했습니다. 성도들을 이런 미신과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The Authority of Scripture)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가 정경(Canon)을 결정하기에 교회 권위가 성경 권위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지만, 종교개혁가들은 그 어떤 교회도, 그 어떤 전통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권위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회복을 위해서, 성경이 라틴어로만 고정되어 있는 것을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사제들만 읽을 수 있도록 한 성경을 모든 회중들이 읽을 수 있도록, 설교나 예배도 회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했습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계속해서 개혁의 정신을 유지하며 개혁해야 할 부분들이 무엇일까요? 첫째, 사람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죄와 욕심으로 말미암아 타락했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왕으로 모셔들이는 일입니다. 사람의 회복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채 죽어갈 것입니다. 두번째, 사명의 회복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은총을 입도록 하는 일입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예배, 선교(영혼 구원), 교육, 친교(사랑), 사회봉사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는 본질적 사명을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 사명을 게을리하는 교회는 비본질적 문제로 싸우게 됩니다. 주도권 싸움,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경건의 능력 상실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회복되고, 사명을 회복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 회복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영상 휴먼다큐- 사랑♥)
1. 주님은 ( 실패 )한 인생을 찾아가신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났던 날도 베드로가 물고기 잡는 일에 실패했던 날이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어부로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일이 어떻게 항상 잘 될 수 있겠습니까? 잘 되는 날이 있으면 안 되는 날도 있는게 사실인데, 주님은 베드로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만나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밤 새 수고했지만 잡힌 것이 없는, 허탕친 날, 쓰라린 마음으로 그물을 거둬들일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 앞에 서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옛날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실패하여,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 그 때는 물고기 잡는 일에 실패해서 그저 허전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물고기 잡는 일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일에 실패했을 때는 후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배신을 한 자신의 행동은 가슴이 저미도록 아팠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것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3년 넘게, 주님과 같은 꿈을 나누고, 같은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난 다음에 베드로는 엉엉 울었습니다. 목 놓아 통곡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비겁하고 연약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나를 수제자로 여기시고 어디든 데리고 다니셨는데, 나는 총 칼 앞에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니요, 힘없는 여종 앞에서조차 주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과 실망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말 없이 바닷가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바다 바람을 맞으며, 추위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배에서 몸부림치며 피곤할 대로 피곤해진 제자들을 위해서 주님은 따끈한 음식을 만드셨습니다. 배고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제자들을 주님은 맛있는 음식으로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루 아침에 재산 피해를 입고 잠 잘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잠자리를 내어주십니다. 며칠 동안 음식 구경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국물이나 스프를 끓여주시는 분입니다. 몸이 아파서 다른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시면 그 사람 병부터 고쳐주시는 분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상처받은 사람을 찾아가시고, 그 사람을 만나면 치료부터 해주십니다. 컴플렉스가 있어서 마음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시면, 칭찬과 격려로 자신감을 심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할 때, 실험을 할 때마다 거듭 실패했습니다. 1,267번 실패했습니다.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낙심해 있을 때, 친한 친구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 번만 더 해봐라. 기왕이면 1,300번 채워봐라.” 이 말에 힘을 얻어 1,268번째 실험만에 백열등이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치유해주실 때도, 훈계부터 하지 않으셨습니다. 낙심한 엘리야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충분한 음식으로 먹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 지친 그의 몸을 어루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푹 자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회복시키셨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4~8)
2.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 주님의 ( 사랑 )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면 회복된다.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비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물고기 잡으러 떠난 제자들을 바닷가까지 찾아가신 주님이 그들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신 다음에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시몬은 흔들리는 갈대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런 인간적이고 연약한 베드로를 베드로라고, 반석이라고 불러주셨던 주님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반석은 커녕, 동맹이도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이름으로 그를 다정하게 불러주신 주님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부끄러운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왜 나를 모른다고 부인했냐고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야단치거나 혼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약점, 실수, 과오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비판도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눈으로 베드로를 쳐다보셨습니다. 옛날과 똑같이 대해주셨습니다. 예전에 함께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하면서 이야기했듯이, 지금도 주님은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요? 베드로의 아픈 마음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이 지금 너무 아프다는 것을 아시기에, 주님도 아파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나도 함께 고통받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쁘면 나도 같이 즐겁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울면 나도 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면 내가 잘 된 것처럼 행복합니다. 주님은 변함없었습니다. 베드로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그런데 베드로는 왜 예수님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을까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처럼 나도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나를 이해해주셨지만 베드로는 주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지만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실패와 연약함도 사랑하셨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십자가, 인간적으로는 실패처럼 보이는 그 죽음을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손에 의해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비참한 모습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것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신앙이 어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원인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보다 나를 더 사랑했기에, 내 목숨을 살리고자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예전처럼 한결같다고. 주님은 어제도 사랑했고, 오늘도 사랑하고 있으며, 내일도 사랑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흔들리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3. 주님과 나의 ( 관계 )가 회복하면,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보다, 자신의 기대와 포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베드로의 신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주님은 멀어지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내가 더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면 생길수록 불안해졌습니다. 혹시 예수님이 나를 싫어하시거나 실망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잘 해야 한다고 의지를 품으면 품을수록 주님은 다른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정이 가장 깊다고 느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빌 게이츠가 쓴 책 가운데,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우리 회사에서 사람을 고용할 때, 이제는 되도록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을 많이 쓰겠다. 실패가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실패했다는 사실만으로 고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실패했던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당신은 무엇을 배웠느냐고?”
실패를 통해서 배운 사람,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레슨받은 사람, 깨달은 사람, 교훈을 얻은 사람은 그 실패가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내 열심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 인간적인 기대보다 주님께서 나에게 향하신 기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전에는 내 충동대로 살았습니다. 내 육체적 본능이 원하는 것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느낌대로, 마음대로 살다가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통해서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의 사명을 받은 베드로는 더 이상 철없는 어린애로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플레이 보이가 아니라 젠틀맨이 되고 싶었습니다.
인간적인 혈기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의욕보다 기도가 앞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흥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말하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알기에 교만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칭찬해주었습니다. 비난을 들어도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았습니다. 칭찬을 들어도 우쭐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잔잔한 평안을 누렸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베드로를 사랑하셨고,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을 회개시킬 수 있는 능력의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주님과의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자, 그의 인생은 주님으로부터 다시 쓰임받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도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 요 21:15 ~ 23
제목 : 사랑의 회복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492주년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있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타락한 인간 영혼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Scripture)는 것입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요, 말씀으로 돌아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가 언제나 늘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Church must be reformed)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repent)하지 않으면 회복(recover)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1229년 발렌시아교회 회의를 통하여 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여 말씀의 암흑 시대를 초래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천국에 대한 말씀도 듣지 못한 채, 인간의 공로 사상에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성자들을 예수님처럼 떠받들었고, 그 결과 직업에 따른 수호 성자를 두기까지 했습니다. 성도들을 이런 미신과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The Authority of Scripture)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가 정경(Canon)을 결정하기에 교회 권위가 성경 권위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지만, 종교개혁가들은 그 어떤 교회도, 그 어떤 전통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권위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회복을 위해서, 성경이 라틴어로만 고정되어 있는 것을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사제들만 읽을 수 있도록 한 성경을 모든 회중들이 읽을 수 있도록, 설교나 예배도 회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했습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계속해서 개혁의 정신을 유지하며 개혁해야 할 부분들이 무엇일까요? 첫째, 사람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죄와 욕심으로 말미암아 타락했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왕으로 모셔들이는 일입니다. 사람의 회복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채 죽어갈 것입니다. 두번째, 사명의 회복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은총을 입도록 하는 일입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예배, 선교(영혼 구원), 교육, 친교(사랑), 사회봉사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는 본질적 사명을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 사명을 게을리하는 교회는 비본질적 문제로 싸우게 됩니다. 주도권 싸움,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경건의 능력 상실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회복되고, 사명을 회복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 회복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영상 휴먼다큐- 사랑♥)
1. 주님은 ( 실패 )한 인생을 찾아가신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났던 날도 베드로가 물고기 잡는 일에 실패했던 날이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어부로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일이 어떻게 항상 잘 될 수 있겠습니까? 잘 되는 날이 있으면 안 되는 날도 있는게 사실인데, 주님은 베드로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만나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밤 새 수고했지만 잡힌 것이 없는, 허탕친 날, 쓰라린 마음으로 그물을 거둬들일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 앞에 서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옛날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실패하여,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 그 때는 물고기 잡는 일에 실패해서 그저 허전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물고기 잡는 일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일에 실패했을 때는 후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배신을 한 자신의 행동은 가슴이 저미도록 아팠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것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3년 넘게, 주님과 같은 꿈을 나누고, 같은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난 다음에 베드로는 엉엉 울었습니다. 목 놓아 통곡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비겁하고 연약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나를 수제자로 여기시고 어디든 데리고 다니셨는데, 나는 총 칼 앞에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니요, 힘없는 여종 앞에서조차 주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과 실망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말 없이 바닷가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바다 바람을 맞으며, 추위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배에서 몸부림치며 피곤할 대로 피곤해진 제자들을 위해서 주님은 따끈한 음식을 만드셨습니다. 배고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제자들을 주님은 맛있는 음식으로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루 아침에 재산 피해를 입고 잠 잘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잠자리를 내어주십니다. 며칠 동안 음식 구경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국물이나 스프를 끓여주시는 분입니다. 몸이 아파서 다른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시면 그 사람 병부터 고쳐주시는 분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상처받은 사람을 찾아가시고, 그 사람을 만나면 치료부터 해주십니다. 컴플렉스가 있어서 마음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시면, 칭찬과 격려로 자신감을 심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할 때, 실험을 할 때마다 거듭 실패했습니다. 1,267번 실패했습니다.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낙심해 있을 때, 친한 친구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 번만 더 해봐라. 기왕이면 1,300번 채워봐라.” 이 말에 힘을 얻어 1,268번째 실험만에 백열등이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치유해주실 때도, 훈계부터 하지 않으셨습니다. 낙심한 엘리야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충분한 음식으로 먹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 지친 그의 몸을 어루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푹 자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회복시키셨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4~8)
2.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 주님의 ( 사랑 )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면 회복된다.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비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물고기 잡으러 떠난 제자들을 바닷가까지 찾아가신 주님이 그들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신 다음에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시몬은 흔들리는 갈대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런 인간적이고 연약한 베드로를 베드로라고, 반석이라고 불러주셨던 주님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반석은 커녕, 동맹이도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이름으로 그를 다정하게 불러주신 주님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부끄러운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왜 나를 모른다고 부인했냐고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야단치거나 혼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약점, 실수, 과오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비판도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눈으로 베드로를 쳐다보셨습니다. 옛날과 똑같이 대해주셨습니다. 예전에 함께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하면서 이야기했듯이, 지금도 주님은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요? 베드로의 아픈 마음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이 지금 너무 아프다는 것을 아시기에, 주님도 아파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나도 함께 고통받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쁘면 나도 같이 즐겁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울면 나도 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면 내가 잘 된 것처럼 행복합니다. 주님은 변함없었습니다. 베드로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그런데 베드로는 왜 예수님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을까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처럼 나도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나를 이해해주셨지만 베드로는 주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지만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실패와 연약함도 사랑하셨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십자가, 인간적으로는 실패처럼 보이는 그 죽음을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손에 의해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비참한 모습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것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신앙이 어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원인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보다 나를 더 사랑했기에, 내 목숨을 살리고자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예전처럼 한결같다고. 주님은 어제도 사랑했고, 오늘도 사랑하고 있으며, 내일도 사랑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흔들리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3. 주님과 나의 ( 관계 )가 회복하면,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보다, 자신의 기대와 포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베드로의 신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주님은 멀어지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내가 더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면 생길수록 불안해졌습니다. 혹시 예수님이 나를 싫어하시거나 실망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잘 해야 한다고 의지를 품으면 품을수록 주님은 다른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정이 가장 깊다고 느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빌 게이츠가 쓴 책 가운데,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우리 회사에서 사람을 고용할 때, 이제는 되도록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을 많이 쓰겠다. 실패가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실패했다는 사실만으로 고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실패했던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당신은 무엇을 배웠느냐고?”
실패를 통해서 배운 사람,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레슨받은 사람, 깨달은 사람, 교훈을 얻은 사람은 그 실패가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내 열심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 인간적인 기대보다 주님께서 나에게 향하신 기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전에는 내 충동대로 살았습니다. 내 육체적 본능이 원하는 것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느낌대로, 마음대로 살다가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통해서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의 사명을 받은 베드로는 더 이상 철없는 어린애로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플레이 보이가 아니라 젠틀맨이 되고 싶었습니다.
인간적인 혈기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의욕보다 기도가 앞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흥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말하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알기에 교만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칭찬해주었습니다. 비난을 들어도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았습니다. 칭찬을 들어도 우쭐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잔잔한 평안을 누렸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베드로를 사랑하셨고,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을 회개시킬 수 있는 능력의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주님과의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자, 그의 인생은 주님으로부터 다시 쓰임받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도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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