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헤론(Gale. Gibson Heron, 1860-1908) 선교사는 첫 남편 존 헤론(John Heron, 1858-1890) 선교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파송으로 1885년 내한하여 선교사역을 하다가 남편 헤론이 1890년 7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헤론의 아버지는 테네시주에 있는 녹스빌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때마침 그가 의과대학을 졸업하자 전 보스보로의과대학 교수의 딸인 깁슨과 결혼을 하고, 그 해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부에서 의료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조선 선교사로 오게 됐다. 이들은 일본에 머물면서 이수정으로부터 한글과 조선 역사를 배우고, 알지 못했던 조선에 도착하여 제중원에서 원장으로 수많은 환자들에게 건강을 찿아 주었다. 이 때 그를 내조했던 깁슨 헤론은 두 자녀를 키우면서 남편의 하는 사역에 대해서 매우 행복감을 갖고 살았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뿐이었다. 장녀 안나와 차녀 엘리자벳을 낳아 날마다 한국 선교의 기쁨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던 도중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깁슨 헤론은 미망인이 되었다. 헤론은 두 자녀를 부둥켜 안고 매일같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동료 선교사들의 사랑과 기도로 2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가정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됐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독신으로 한국 원산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게일(J. S. Gale, 기일, 1868-) 선교사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됐다. 게일 선교사는 30세의 총각이었기에 33세의 미망인인 깁슨 헤론보다 3세가 어렸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1892년 정식 청혼을 하여 헤론과 결혼을 했다. 게일은 헤론과 그녀의 두 딸을 맞이했고, 헤론은 다시 그 옛날처럼 따뜻한 사람을 느끼면서 게일 선교사를 잘 내조하였다. 게일 선교사는 두 딸이 낳아준 아버지 성을 사용토록 하여 자신의 호적에 등록을 하였다.

게일은 한국 이름으로 기일이라고 불렀다. 깁슨 헤론과 결혼한 후로는 기이(奇異)한 선교사로 불렸다. 여기에 게일 선교사는 모든 선교사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특히 여성들에게 더 많은 인기가 있었다. 게일 선교사는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사람이지만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보다 훨씬 많은 저서를 냈던 선교사로, 기이상(奇異常)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곤당골에 신방을 꾸몄던 게일과 깁슨은 무어 선교사와 손을 잡고 곤당골교회를 도왔다. 이 무렵 게일은 기퍼드와 그래함 리가 천민들을 모아 놓고 목회를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 연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연동교회를 이끌고 갔었다. 1894년 연동교회를 개척했던 그래함 리는 마펫과 함께 평양 선교부로 이전해 갔으며, 기퍼드 선교사도 열심히 연동교회 선교에 힘을 쏟았지만 그도 먼저 세상을 떠나 자연히 게일은 연동교회를 이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연동교회에 부임했던 게일 선교사는 교회에 천민들이 많이 모였기에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면서 저술 활동을 많이 하였다. 비록 신학교는 졸업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역에 놀란 마펫은 자신이 안수받았던 미국교회에 연락을 하여 1897년 엘버니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하였다. 특별히 마펫과 절친하게 된 동기는 언더우드는 신(God)을 천주라 하였지만 마펫과 게일이 주장하여 하나님이라 부르게 하면서부터였다.

게일 선교사는 부인 깁슨과 두 딸을 잠시 스위스 로잔으로 보냈다가 요양이 다 끝나자 1907년 서울에 다시 안착을 하며 연동교회 교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908년 깁슨은 결핵으로 삶을 마감하고 본 남편인 헤론 묘 옆에 자리를 마련해 양화진에 안장을 하였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