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S. F. Moore, 1860-1906. 모삼열) 선교사는 1892년 시카고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인 로즈(E. Rose)와 함께 고향인 미국 일리노이를 떠나 1892년 9월 19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에 동승했던 그래함 리(G. Lee. 이길함) 선교사 일행과 목선을 타고 강화도 앞을 지나 한강을 거슬러 밤에 서울 마포강가에 도착하였다.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좋은 어학교사를 만나 한글을 배웠으며, 한글로 전도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어학에 능통하였다. 무어는 권서 서상륜과 함께 백정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곤당골(을지로 입구, 현 롯데호텔)에 자리를 잡고 백정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여 1893년 6월 16명이 모인 가운데 곤당골 교회를 설립하였다.
조선말에 익숙한 무어의 전도 열정에 놀란 백정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 중에 곤당골교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백정 박성춘을 만났다. 그의 아들 박봉출은 곤당골교회에서 운영하는 기독소학교를 다녔다. 이 무렵 박성춘이 발진티푸스 병에 걸려 사경을 해매고 있을 때 제중원 원장 에비슨의 진료로 고침을 받고 큰 감명을 받았다. 여기에 전도에 자신을 얻었던 무어는 양반들에게도 전도하여 상민과 천민 구별 없이 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1895년 4월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무어의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박성춘은, 무어와 협력하여 백정 선교에 힘을 쏟았다. 이 일로 곤당골교회의 분위기가 신분 철폐 쪽으로 흘러가자 양반들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러던 어느 주일예배 후에 양반들이 무어에게 협력을 요청하였다.
“선교사님, 우리 조선은 백정과 양반 사이에는 엄청난 신분의 차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양반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앞자리를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사회로부터 냉대받은 사람을 가까이 지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으며, 다 주님 안에서는 형제고 자매입니다.”
양반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무어 선교사는 이들의 요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무어 선교사의 뜻과 기독교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양반들은 즉시 따로 모여 의논을 하였다.
“우리 여기서 예배 드리지 말고 따로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드립시다.”
이러한 말을 들었던 양반들은 을지로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교 근방에 있는 홍문삿골(현 광교근방)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던 무어 선교사는 천민들이 모여 사는 마포 강변으로 오르내리면서, 어부 생활을 하는 그 지역에도 전도를 하였다. 예수 안에서 신분이 철폐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천민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고, 무어 선교사는 마포에서 배를 타고 광나루까지 다니면서 전도한 결과 16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마포구 있는 동막교회와 서대문구에 있는 대현교회이다. 1898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홍문삿골교회가 불타고 말았다. 그러자 홍문삿골교회 교인들이 곤당골교회에 찾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였다.
“선교사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곤당골교회로 와서 선교사님의 말씀대로 예수 안에서 천민 양반이 함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로 재결합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교인들이 많이 모여들자 무어 선교사는 주민이 많이 사는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기어 예배 처소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해서 인사동으로 옮겨오고 양반 천민이 모여들자 교회는 크게 부흥이 되었다. 이들이 하나가 되어 인사동교회가 완성되자 1905년 종로구 인사동으로 교회를 옮기고 양반과 천민이 함께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면서 승동교회(勝洞敎會)라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무어는 불행하게도 1906년 12월 장질부사에 걸려 제중원 원장인 에비슨의 정성어린 진료를 받았지만 46세의 젊은 나이로 그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그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수많은 백정을 비롯한 천민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고 기도를 하고 돌아와서 천민 해방 운동에 더욱 힘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는 무어가 최초의 민중목회자의 창시자라고 말할 수 있다. 무어 부인은 남편이 별세한 지 1년 만에 조선의 수많은 백정들과 천민들의 해방운동을 승동교회 교인들의 몫으로 남기고 조선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무어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백정들은 민중운동에 앞장선 무어의 정신을 이었다. 만민공동회가 종로통에 모일 때는 항상 박성춘이 나타나 백정과 양반의 구별을 없애 달라는 백정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승동교회에서 장로 선거를 할 때 백정 박성춘이 당선되자 양반들이 더 이상 천민들과 같이 다닐 수 없다 하면서 안국동에 안동교회를 설립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
조선말에 익숙한 무어의 전도 열정에 놀란 백정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 중에 곤당골교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백정 박성춘을 만났다. 그의 아들 박봉출은 곤당골교회에서 운영하는 기독소학교를 다녔다. 이 무렵 박성춘이 발진티푸스 병에 걸려 사경을 해매고 있을 때 제중원 원장 에비슨의 진료로 고침을 받고 큰 감명을 받았다. 여기에 전도에 자신을 얻었던 무어는 양반들에게도 전도하여 상민과 천민 구별 없이 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1895년 4월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무어의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박성춘은, 무어와 협력하여 백정 선교에 힘을 쏟았다. 이 일로 곤당골교회의 분위기가 신분 철폐 쪽으로 흘러가자 양반들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러던 어느 주일예배 후에 양반들이 무어에게 협력을 요청하였다.
“선교사님, 우리 조선은 백정과 양반 사이에는 엄청난 신분의 차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양반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앞자리를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사회로부터 냉대받은 사람을 가까이 지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으며, 다 주님 안에서는 형제고 자매입니다.”
양반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무어 선교사는 이들의 요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무어 선교사의 뜻과 기독교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양반들은 즉시 따로 모여 의논을 하였다.
“우리 여기서 예배 드리지 말고 따로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드립시다.”
이러한 말을 들었던 양반들은 을지로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교 근방에 있는 홍문삿골(현 광교근방)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던 무어 선교사는 천민들이 모여 사는 마포 강변으로 오르내리면서, 어부 생활을 하는 그 지역에도 전도를 하였다. 예수 안에서 신분이 철폐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천민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고, 무어 선교사는 마포에서 배를 타고 광나루까지 다니면서 전도한 결과 16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마포구 있는 동막교회와 서대문구에 있는 대현교회이다. 1898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홍문삿골교회가 불타고 말았다. 그러자 홍문삿골교회 교인들이 곤당골교회에 찾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였다.
“선교사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곤당골교회로 와서 선교사님의 말씀대로 예수 안에서 천민 양반이 함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로 재결합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교인들이 많이 모여들자 무어 선교사는 주민이 많이 사는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기어 예배 처소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해서 인사동으로 옮겨오고 양반 천민이 모여들자 교회는 크게 부흥이 되었다. 이들이 하나가 되어 인사동교회가 완성되자 1905년 종로구 인사동으로 교회를 옮기고 양반과 천민이 함께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면서 승동교회(勝洞敎會)라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무어는 불행하게도 1906년 12월 장질부사에 걸려 제중원 원장인 에비슨의 정성어린 진료를 받았지만 46세의 젊은 나이로 그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그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수많은 백정을 비롯한 천민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고 기도를 하고 돌아와서 천민 해방 운동에 더욱 힘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는 무어가 최초의 민중목회자의 창시자라고 말할 수 있다. 무어 부인은 남편이 별세한 지 1년 만에 조선의 수많은 백정들과 천민들의 해방운동을 승동교회 교인들의 몫으로 남기고 조선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무어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백정들은 민중운동에 앞장선 무어의 정신을 이었다. 만민공동회가 종로통에 모일 때는 항상 박성춘이 나타나 백정과 양반의 구별을 없애 달라는 백정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승동교회에서 장로 선거를 할 때 백정 박성춘이 당선되자 양반들이 더 이상 천민들과 같이 다닐 수 없다 하면서 안국동에 안동교회를 설립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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