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5월 24일 기독교대한감리교회(당시 감독회장 신경하)는 요한 웨슬리 회심 268주년을 기념해서 하디의 두 딸이 묻혀 있는 양화진에 하디의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를 설립하였다. 기념비 내용을 살펴보면 “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위대한 불씨로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의 영적각성을 이끌어 낸 주역이다. 이제 100주년을 맞아 다시 영적대각성운동의 불길을 사모하고 그가 이 땅에 남기고 간 사랑하는 두 딸의 흔적을 기억하면서 이 비를 세워 역사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디(R. A. Hardie, 하리영) 선교사는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고등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지냈다. 후에는 의사가 되어 병든 이웃을 의술로 돕겠다는 큰 뜻을 갖고 토론토대학 의학부에 진학하였다. 2학년 때 기독교외국 선교 학생자원운동에 자원하여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선교사로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 켈리(M. Kelly)와 결혼하고 1890년 의사가 된 후 캐나다 대학생 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8년간 계약을 하여 1890년 가족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였다.

당시 부산에서 체류하는 동안 기일 선교사와 함께 사역을 하였으며, 그 후 상경하여 제중원에서 에비슨 의사와 함께 몰려드는 환자를 나누어 진료하였다. 이 때 하디는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을 많이 살려주었고 그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수도 없이 받았다. 1892년 부산에 의료진이 부족하여 1년 동안 진료하다가 8년간의 계약이 끝났다.

이 때 마침 감리교 원산선교부의 초청을 받고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소속이 되었다. 1892년 11월 원산선교부에서는 강원도 지방까지 맡아 선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활동무대는 광활하였다. 1901년 10월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15명을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비록 15명을 모아 놓고 목회하였지만 훗날 자신의 영적인 면에서 연약했음을 보고한 일이 있었다. 그는 “3년 동안 미국 남감리회가 세워진 지방에서 애써 사역을 하였지만 선교사업에 실패하였다”고 고백하였다. 그 후 그는 갈급한 마음을 갖고 1903년 8월 여름 휴가도 포기한 채 원산에서 7명의 선교사가 중국 감리교 소속 화이트(Miss M. C. White) 선교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개최한 사경회에 참석했다. 이 때 하디는 화이트 선교사의 강의에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를 하였다.

화이트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는데 1900년 뜻하지 않게 북경조약이 이루어 지면서 중국이 서구의 한 식민지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있던 중국인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반기독교적인 운동과 반서구화적인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이 결국 의화단 사건으로 연결되면서 철저하게 선교사를 배격하고 어떤 경우는 살해까지 하게 되었다. 이 일로 중구에서 활동하던 개신교 선교사 153명이 살해를 당하는 수난을 만났다. 이 때 이 숫자는 중국 주재 외국인 선교사의 15%에 해당되는 숫자였다.

이러한 수난 속에서 화이트 선교사는 기적 중의 기적으로 살아났으며, 그때 자신이 하나님께 했던 서원을 원산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전하였다. 화이트 선교사의 말에 은혜를 받았던 하디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마룻바닥에 뒹굴면서 “하나님 살려 주세요, 이제는 조선 민족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겠습니다.”라고 했고, 이 말은 들었던 다른 선교사들도 회개의 눈물로 이 모임을 뜨겁게 불태웠다.

특별히 하디는 이 일로 일약 유명해 졌으며, 각 교파를 초월해서 초청받아 가면 먼저 무릎을 끓고 회중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그러면 조선인 회중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소식이 전국 감리교회에 알려지자, 1909년 그를 감리교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장으로 초빙을 하였다. 그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요한 웨슬리의 회심과 성령운동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감리교회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 변화된 모습을 활자화한다면서 만든 것이 바로 교수들의 논문집인 “神學世界”다. 그의 열성은 감리교회를 새롭게 변화를 시켜 놓았으며, 이 일로 일제의 관리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자 결국 1935년 4월 은퇴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하디 선교사의 영적대각성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제막하던 당시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그의 부부가 45년간의 조선 선교사역을 마감하고 떠나는 날 두 딸이 묻혀 있는 양화진에서 마지막 고별식을 가졌다. 그 순간 하디 부부는 양화진에 묻혀 있는 딸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려 결국 많은 회중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조선에 온지 얼마 안 된 1893년 8월 9일에 딸을 얻었지만 그 기쁨도 잠시 뿐, 하루 만인 8월 10일 주께서 데려 갔다. 이들 부부는 동료선교사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양화진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 후 1903년 9월 1일 둘째 딸을 얻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둘째 딸도 1909년 여섯 살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또 양화진에 묻고 말았다.

우리 속담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 묻고 자녀가 죽게 되면 가슴에 묻는 다는 말이 있다. 이들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두 자녀를 가슴에 안고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