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오실 때까지”

양화진 이야기는 끝이 없다. 나는 2007년에 양화진에 잠들고 있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예수 오실 때까지”라는 책을 출간한 일이 있다. 선교사 109명이 잠들고 있는 이곳 양화진에 방문했을 때 책 제목을 짓는 데 영감을 준 선교사가 있었다. 그의 묘비는 양화진 묘역 서쪽 담벼락에 묻혀 있어서 보일락말락할 정도로 작았다. 그 묘비에 쓰여진 “Till He Comes”이라는 글귀는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대선 선교사의 부인의 묘비. “예수 오실 때까지(Till He Comes)”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글이 쓰여진 묘비의 주인공은 경상북도 안동지방에서 선교활동하였던 안대선(W. J. Aanderson) 선교사의 부인이다. 안대선 선교사는 우리 민족이 1919년 3.1운동을 일으켰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희망을 잃고 있을 때, 안동에 있는 농촌과 산골을 찾아다니면서 조선 청년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다. 바로 그것이 기독청년면려회운동(C.E)이었다. 그는 교회마다 순회하면서 이 운동을 조직화하고 종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허가를 받아 1924년 12월 서울에 있는 피어선성서학원 강당에서 각 지방 청년 대표자들을 모아 만국조선기독청년면려회(C.E)를 조직하였다. 안대선 선교사는 총무의 직책을 맡았다. 이러한 계기로 그의 부인도 남편을 따라 상경하게 되었으며, 피어선성경학원에서 여성을 상대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성경을 가리치던 안대선 선교사의 부인은 1934년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녀는 세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안동이 출생지였다. 그녀는 남편과 세 자녀를 남기고 양화진에 자리를 잡고 말았다.

안대선 선교사는 1941년 일제의 강제 추방으로 부인을 조선땅에 남기고 세 자녀와 함께 일본을 거쳐 고향 미국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아내의 묘를 뒤로하고 떠나는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저 “예수 오실 때까지”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0년 삶을 마감하였다. 그 후 C.E운동은 예장 통합측에서는 남선교회전국연합회로 개명을 하고 북한 선교에 힘을 기울이던 중 2008년 9월에 평양 봉수교회를 50억을 지원하여 헌당식을 가졌으며, 예장 합동 남전도회연합회는 농촌교회 전도운동에 힘을 쏟고 있다.

“만일 내게 천(千)의 생명이 있다 해도 조선에 바치리라”

▲ 꽃다운 25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켄드릭 선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묘비에는 “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있다 해도 조선에 바치리라(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위에 있는 글귀는 켄드릭(Miss R. R. Kendrik) 선교사가 꽃다운 나이 25세에 삶을 마감하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던 묘비에 새겨진 말이다. 영어로는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이다. 양화진을 순례한 순례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묘비 앞을 지나다 잠시 발을 멈추고, 그의 유언을 영어로 쓴 글을 읽는 순간 스스로 머리를 숙이게 된다.

켄드릭 선교사는 1883년 1월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캔자스 여자성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후 조선 선교사로 지원할 것을 결심하고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를 찾아 나섰다. 불행하게도 선교사 파송 연령이 두 살이나 모자라 할 수 없이 기도하면서 1년은 성경교사로 일하였으며, 나머지 1년은 대학 특별과에 진학하여 공부하였다.

1907년 감리교회의 청년운동인 텍사스 청년연합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그 단체의 후원으로 미국 남감리교회 해외 선교부의 정식 허락을 받아 내한하게 되었다. 켄드릭은 도착하자마자 어려운 한글을 공부하고 서툰 언어로 황해도 개성에 있는 개성성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그러나 워낙 한글이 어려워 사역하는 데 많은 스트레스를 받다가 그만 급성 맹장염을 앓아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의사들이 정성껏 수술을 실시했고 많은 선교사들이 간절히 기도했으나, 1908년 8월 18일 25세의 꽃다운 젊은 처녀의 몸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조선에서 선교하는 기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향으로 서신을 보냄과 함께 텍사스 청년연합회로 늘 소식을 전하였다. 청년들은 모일 때마다 켄드릭 선교사의 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지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선교기금을 보내 주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켄드릭은 이미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켄드릭 선교사는 자신의 삶을 정리나 하듯이 마지막 유언과 같은 서신을 부모에게 보냈다.

“오늘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조선인들이) 외국인들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아빠, 엄마 얼굴이 자꾸 제 눈에 아른거립니다. 아빠, 엄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주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기도하면서, 병상에서 올림.”

그의 보고서 말미에는 조선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헌금은 물론 기도까지 부탁하고 있다. 켄드릭 선교사의 마지막 서신에는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조선으로 나오라고 일러 주세요”라고 기록돼 있다. 그는 이 유언을 서신에 남기고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고 말았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