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교인들 가운데 양화진 외국인 묘지라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바로 이곳은 이수정의 선교사 유치운동에 감동을 받고 천박한 조선땅에서 의료 선교와 교육사업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많은 선교사들이 이땅에 젊음을 바치다가 순교한 선교사들이 오직 주님 오실날만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이곳 양화진에는 1890년에서부터 선교사들이 일제의 강제에 의해 철수할 때까지인 1940년까지 그들의 생을 조선 땅에서 삶을 마감했던 의료 선교인 헤론의 무덤을 비롯해서 167기(선교사 109, 가족 58기)가 자리를 잡고 있다. 방문하기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찾아 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치를 말하자면 서울에서 2호선, 6호선 전철을 타고 합정역 7번 역에서 내려서 찾아가면 된다. 나는 매학기 강의하고 있는 장신대 신대원 학생들을 인솔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수없이 찾아 나섰으며, 그럴 때마다 신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에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는 찬란한 태양빛이 내려 쪼이고 있었다. 또 무더운 여름철에도 양화진에 있는 나무마다 무성하게 초록색 옷을 입고 양화진에 묻혀 있는 선교사들의 묘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것만 같았다.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때에 기념사업으로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한 일이 있었다. 이곳을 방문하면 이 기념관 앞에 정연희 작가의 쓴 시 한 절이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만들어 준다.
영혼의 고향 하늘나라로 가는 길목/백 년 전에 이 땅을 예수께서 지적하신
땅 끝으로 믿고/아비의 집을 떠난 젊은이들이
그 생애를 기꺼이 바치고/주안에서 잠든 곳
가난과 질병과 무지와 억압 속에서/신음하던 이 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고/우리들의 가난 우리들의 질병을
함께 지고 가다가/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은 이들이
그 육신을 묻은 언덕
강물은 세월의 매듭을 풀어/끝없이 흐르는데
이 땅의 역사와 개화의 진통은/뭇 형제의 목숨을 이 언덕에 심었으니
그 사랑의 터 밭에서 열매 맺은 믿음은/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든
사랑의 승리여라
이 시를 통해서 외국 선진국의 젊은 예수의 제자가 자신의 목숨도 개의치 않고 100여년 전에 조선을 찾아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양화진에 묻혔던 헤론(DR. John W. Heron) 선교사는 1885년 5월에 다른 선교사와 함께 인천항을 통해서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의사로, 미국에서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편하게 살 수 있는 전문직의 소유자였다. 여기에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남아 달라는 간절한 부탁도 뿌리친 채 조선 땅에 왔을까. 그는 낯설고 물설고 위생시설이나 주거시설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된 땅에서 이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고, 짐을 풀고 어려운 한글을 열심히 배우면서 의료선교에 임하였다.
그런데 그는 1890년 서울에 온지 5년 만에 그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그를 낳아 길렀던 부모, 형제들 또한 그를 파송했던 미국교회 교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조선인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제중원에서 왕진 가방을 손에 들고 바삐 환자를 찾아 나섰던 청년 헤론 선교사는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의 시신이 문제였다. 그렇게 뜨거웠던 7월, 사대문 안에 묘지를 찾아 나섰지만, 그에게는 한 평의 땅도 허락되지 않았다. 인천에 따로 외국인 묘지가 있었지만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에 시신을 안고 그곳까지 간다는 것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는 의논하여 헤론 선교사의 저택 안에 있는 자그만한 공간에 땅을 파고 그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런데 이 소식이 정동 마을에 사람들의 귀에 들리고 말았다.
“물러가라, 서양놈아, 사대문 안에 시신을 매장해?”
대대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할 수 없이 고종을 알현하고 정중하게 그의 시신을 안장할 수 있는 땅을 부탁하였다. 딱한 사정을 들은 고종은 그 동안 헤론 선교사가 병으로 고생했던 많은 환자를 치료해 주고, 자신의 궁정에 일하는 일꾼까지 치료 해 준 일에 대해서 보통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일을 곰곰이 생각하던 고종은 사대문 밖의 버려지고 척박한 야산인 양화진을 하사했다. 선교사들은 그것도 주님의 은혜라면서 곧바로 그의 시신에 양화진에 안장을 했다. 고별식 예배를 드릴 때 참석했던 모든 선교사들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다음은 누가 묻힐까!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전문위원장)
이곳 양화진에는 1890년에서부터 선교사들이 일제의 강제에 의해 철수할 때까지인 1940년까지 그들의 생을 조선 땅에서 삶을 마감했던 의료 선교인 헤론의 무덤을 비롯해서 167기(선교사 109, 가족 58기)가 자리를 잡고 있다. 방문하기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찾아 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치를 말하자면 서울에서 2호선, 6호선 전철을 타고 합정역 7번 역에서 내려서 찾아가면 된다. 나는 매학기 강의하고 있는 장신대 신대원 학생들을 인솔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수없이 찾아 나섰으며, 그럴 때마다 신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에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는 찬란한 태양빛이 내려 쪼이고 있었다. 또 무더운 여름철에도 양화진에 있는 나무마다 무성하게 초록색 옷을 입고 양화진에 묻혀 있는 선교사들의 묘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것만 같았다.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때에 기념사업으로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한 일이 있었다. 이곳을 방문하면 이 기념관 앞에 정연희 작가의 쓴 시 한 절이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만들어 준다.
영혼의 고향 하늘나라로 가는 길목/백 년 전에 이 땅을 예수께서 지적하신
땅 끝으로 믿고/아비의 집을 떠난 젊은이들이
그 생애를 기꺼이 바치고/주안에서 잠든 곳
가난과 질병과 무지와 억압 속에서/신음하던 이 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고/우리들의 가난 우리들의 질병을
함께 지고 가다가/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은 이들이
그 육신을 묻은 언덕
강물은 세월의 매듭을 풀어/끝없이 흐르는데
이 땅의 역사와 개화의 진통은/뭇 형제의 목숨을 이 언덕에 심었으니
그 사랑의 터 밭에서 열매 맺은 믿음은/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든
사랑의 승리여라
이 시를 통해서 외국 선진국의 젊은 예수의 제자가 자신의 목숨도 개의치 않고 100여년 전에 조선을 찾아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양화진에 묻혔던 헤론(DR. John W. Heron) 선교사는 1885년 5월에 다른 선교사와 함께 인천항을 통해서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의사로, 미국에서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편하게 살 수 있는 전문직의 소유자였다. 여기에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남아 달라는 간절한 부탁도 뿌리친 채 조선 땅에 왔을까. 그는 낯설고 물설고 위생시설이나 주거시설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된 땅에서 이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고, 짐을 풀고 어려운 한글을 열심히 배우면서 의료선교에 임하였다.
그런데 그는 1890년 서울에 온지 5년 만에 그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그를 낳아 길렀던 부모, 형제들 또한 그를 파송했던 미국교회 교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조선인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제중원에서 왕진 가방을 손에 들고 바삐 환자를 찾아 나섰던 청년 헤론 선교사는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의 시신이 문제였다. 그렇게 뜨거웠던 7월, 사대문 안에 묘지를 찾아 나섰지만, 그에게는 한 평의 땅도 허락되지 않았다. 인천에 따로 외국인 묘지가 있었지만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에 시신을 안고 그곳까지 간다는 것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는 의논하여 헤론 선교사의 저택 안에 있는 자그만한 공간에 땅을 파고 그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런데 이 소식이 정동 마을에 사람들의 귀에 들리고 말았다.
“물러가라, 서양놈아, 사대문 안에 시신을 매장해?”
대대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할 수 없이 고종을 알현하고 정중하게 그의 시신을 안장할 수 있는 땅을 부탁하였다. 딱한 사정을 들은 고종은 그 동안 헤론 선교사가 병으로 고생했던 많은 환자를 치료해 주고, 자신의 궁정에 일하는 일꾼까지 치료 해 준 일에 대해서 보통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일을 곰곰이 생각하던 고종은 사대문 밖의 버려지고 척박한 야산인 양화진을 하사했다. 선교사들은 그것도 주님의 은혜라면서 곧바로 그의 시신에 양화진에 안장을 했다. 고별식 예배를 드릴 때 참석했던 모든 선교사들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다음은 누가 묻힐까!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전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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