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이번 주부터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님의 글 ‘우리 땅의 聖地를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이 글은 한국교회 역사·문화 연구의 권위자이신 김수진 목사님께서 이 땅을 누비며, 곳곳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신앙 선배들의 눈물어린 발자취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 이 땅의 역사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시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이수정(李樹廷)은 전라도 옥과현에서 1843년 대학자 이병규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이 큰아버지는 천주교의 탄압으로 순교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장원급제하여 상경하였으며, 조정의 역사기록가로 활동을 하던 중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를 만나자 그 당시 병사들은 민비(閔妃)를 살해하려고 할 때 극적으로 민비를 구출했다. 조정에서는 민비를 구출했다 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이란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제2차 신사유람단 비수행원으로 일본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882년 10월, 이수정 일행은 인천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東京)에 들어가게 됐다. 도쿄에 도착한 이수정은 비수행원이었기에 자유롭게 개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곧 도쿄에 있는 일본인 교계 지도자 츠다(津田仙) 박사를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수정은 츠다에게 인삼을 선물로 전하였다.

“저는 이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4세기경에 구다라(百濟) 왕인(王人) 박사가 일본에 한자와 유교를 전해 주었지만 그 은혜를 갚지 못한 무례한 백성이 되었는데 저는 이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대신에 제 선물을 받으세요”

츠다가 전해 주었던 선물은 한자로 된 신약전서였다. 츠다는 이 선물을 이수정에게 전해 주면서 “이 안에 있는 예수는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이수정은 신약전서를 선물로 받고, 즉시 숙소로 돌아와서 성경을 읽는 중에 마태복음에 나온 족보기록을 보고 자신이 믿어야 할 종교라는 것을 깨닫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결심하였다.

▲한국 기독교가 뿌리내리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이수정(맨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그 후 이수정은 츠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말에 무릎을 치면서 “이제 조선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츠다의 소개로 일본인 목사 소다(長田時行)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이미 이수정은 성령이 함께하여 성경에 큰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했고, 소다 목사의 소개로 1883년 4월 29일 주일 아침에 동경 노월정교회(현 芝敎會=시바교회)에서 일본인 야스가와(安川亨) 목사와 낙스(G. W. Knox) 선교사에 의해 세례를 받게 됐다(이 교회는 도쿄 긴자센 전철을 타고 도라몬역에 하차하면 나온다).

이수정이 세례받은 그 해 5월, 전 일본기독교대회가 도쿄에서 모일 때 그가 조선을 대표해서 한국어로 대표기도를 하였는데, 이날 대회에 출석했던 일본인들은 다같이 “아멘”으로 끝을 맺었다. 그 다음날에는 요한복음 15장을 읽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였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은 이수정의 신앙고백을 접하고 새로운 조선 선교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이 때 이수정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 Loomis)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마가복음서를 번역하고 있는 한편, 조선에서 온 30명 유학생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이수정의 활동으로 도쿄에 온 유학생들이 모두 개종하고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경공부에 임하였다. 이들의 집단적인 개종으로 1883년 말에는 도쿄에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30여명이 매주일마다 성경학교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그 학교를 ‘도쿄주일학교’라 불렀다.

또한 일본에 있는 동안 미국 선교사들의 사역에 놀란 이수정은 미국교회를 향하여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선교사 유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수정은 일본교회 목사와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883년 7월과 11월 2회에 걸쳐 미국교회에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은 지난날 조선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천주교를 믿었던 이야기를 서두로 시작하여 얼마 있지 않으면 조선에도 신앙의 자유가 올 것임을 강력하게 피력한 내용의 서신이었다. 이 서신은 곧 미국교회의 선교잡지에 소개되었으며, 이 잡지를 읽은 미국교회의 젊은 실업자 청년 맥윌리암스는 곧 5천 불을 헌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교의 열정이 밖에서 서서히 대두되자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감리교 소속 맥클레이는 곧 이수정, 김옥균 등과 접촉하면서 한국 선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바로 1884년 6월 24일 맥클레이는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즉시 김옥균을 만나 한국에서 문화사업으로 교육사업과 병원사업을 할 수 있도록 고종(高宗)에게 허락받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옥균의 노력과 맥클레이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져서 두 가지 문화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고 7월 8일 조선을 떠났다.

그후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서 1884년 12월에 요꼬하마복음인쇄소에서 출간을 하였다. 이때 이수정은 일본에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선교사를 만나 간단한 조선문화 조선어를 가르쳤으며, 만반의 준비를 했던 이들은 인천에 상륙할 때 마가복음서를 가슴에 안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조선 선교에 공이 컸던 이수정은 보수파의 유혹을 받고 1886년 5월 28일 귀국하자 곧 관원에 의해 체포되어 울산에서 44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됐다. 이수정을 연구했던 오윤태 목사는 그를 순교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비록 처형을 당하였지만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후 125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백성이 되었다.

그의 유품은 유일하게 교토(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설립자 니지마(新島襄) 생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의 유품인 이 족자는 도시샤대학교회 교인들에게 원심(圓心)조선 이수정이라는 낙관이 있다. 도시샤대학을 방문하면 이수정 유품도 보고 저항시인 윤동주, 시인 정지용 기념비도 볼 수 있고, 여기에 1,200년간 왕이 살았던 어소(御所), 또 일본인들의 부끄러운 귀무덤도 있어서 역사탐방의 좋은 길목이 되기도 한다.

김수진 목사는

전남 신안 출신으로, 예장(통)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현재 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전문위원장, CCK(한기총) 기독교문화재발굴보존 본부장, 중앙총신대학원 학술원장, 한국목양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찍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한영신학대학교 역사신학과 교수로 제직하면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대학원에 출강하였다. 한편 서울구치소 사형수목회도 하였으며, 인천 대광교회, 익산 황등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 후 예장(통) 총회 교육자원부 총무를 역임하였으며, 대전신대 학부 및 대학원, 평택대 대학원, 한세대 목회대학원 출강, 예장 총회역사위원회원회 전문위원, 모스크바 장신대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기독교발자취》, 《일본기독교발자취》, 《중국개신교회사》, 《일본개신교회사》, 《예수 오실 때까지》,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 《마부 출신으로 총회장을 3회나 역임한 이자익 이야기》, 《총회를 섬긴 일꾼들》, 《한국기독교선구자 이수정》, 《민중의 선구자 조덕삼 장로 이야기》, 《한국장로교초기100장면》, 지방교회사로는 《목포지방기독교100년사》, 《서울동노회역사》, 개교회사로는 《목포양동제일교회 100년사》, 《광주제일교회100년사》, 《대창교회100년사》, 《매계교회100년사, 《군산개복교회110년사》, 《옥산중앙교회100년사》, 《京都敎會의 歷史》 등이 있다. 넌픽션으로 《枯木에 샘물이 흐르고, 서쪽하늘에 햇살이 쏟아지고》 등이 있다.

공저로는 한국기독교역사(1, 2권)》, 《일제의 종교탄압과 한국교회 저항운동》, 《한국기독교사(호남편)》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A. 케베루의 《基督敎的人間像》, 오다나라치(織田楢次)의 《한국을 사랑한 어느 일본인 전도자》, 도히아키오(土把昭夫)의 《일본기독교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