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본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두메산골에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나 농사일만 하던 소녀가 서울의 가정부로 왔습니다. 소녀는 첫날부터 주인집 뒷마당에 가득한 풀을 보면서 걱정이 태반이었습니다. 사흘 째 되던 날, 주인이 외출하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였습니다. 이 소녀 “주인을 위하여 착한 일을 하자” 하고 마음을 먹고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쇠꼬챙이로 질긴 풀을 막 뜯어냈습니다. 그것을 뽑느냐고 온 몸에 물집이 생기고 아팠지만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오후 네 시쯤, 이 소녀의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자기의 일을 칭찬해줄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주인은 그 동안 정성 드려 가꾼 자기의 잔디가 모두 뽑혀 진 것을 보고서 자기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잔뜩 칭찬을 기대했던 소녀에게 돌아온 것은 주인의 심한 꾸중이었습니다. 주인의 꾸중을 들은 소녀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울었습니다.

물론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농촌 문화와 도시 문화의 충돌에 기인한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다가 영적인 생각과 인간적 생각의 충돌이 우리에게 다반사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그 소녀는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이 소녀의 눈에는 자기 주인집 뒷마당에 있는 것들이 쓸모 없는 잡초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라오는 것은 빨리 뽑아 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뽑았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이 정말로 아끼는 이 잔디였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분별력이 없을 때 가끔씩 “잘 했겠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이 심하게 아프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가 분별력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이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내는 작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리고 사울에게 아말렉이라는 민족을 진멸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진멸이라는 말은 남김없이 죽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족속을 남김없이 죽이려고 하셨던 분명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서입니다. 타락된 세상의 원리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여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돕기 위한 목적으로 명하신 것입니다.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그들이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말렉 민족으로부터 그들의 눈에 좋은 가축들을 포함한 재산이 될 만 한 것들을 다 취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눈에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다 진멸하도록 명하셨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투의 승리를 만끽하면서 그들의 눈에 좋은 것들을 다 취한 것입니다.

인간적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승리의 대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영화를 보면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의 모든 물건들을 취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승리의 댓가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사울과 그의 백성들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진멸하라는 것을 다 진멸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런 표현을 하십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우리가 가끔씩 마음이 너무 아플 때, 영어로 grieved로 표현합니다. 이 단어 속에는 ‘배신감’과 같은 감정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grieved라는 단어가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하여 후회한다는 영어번역본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사울에 대하여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사울이 범한 큰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분별력을 잃었다는 것이 사울의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그리고 기뻐하시지 않는 부분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는 분별력 부재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TV의 드라마를 볼 때마다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어디까지가 진정한 사랑이요, 어디까지가 불륜인지 구별이 안갑니다. 어디까지가 의로운 삶이고, 어디까지가 불의의 삶인지 구분이 안 갑니다. 조직폭력배가 멋있게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불륜이라는 것이 참 사랑인 것 같고, 아름다운 낭만적인 로맨스인 것 같고, 그래서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구분이 안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구분이 안 가는 시대에 우리의 자녀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깊어지면 모든 것을 구별하기가 쉬워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매사에 깊이 있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문제가 안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분별력을 가져야만 합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분별력을 계발하여만 합니다. 분별력이 성공적인 삶을 위한 분명한 전제가 됨을 결코 잊지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