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 중심의 서구 사회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 대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 암시했다. 2001년 9·11테러,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이를 확증해 준 축소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종교 단체 간 대결, 신학적 대결, 영적 현상 및 회심 대결 등에서 양 종교는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테러와 대 테러 전, 종교 박해와 같은 형태로도 대결은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은 어떤 종교인가?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일보에서는 김덕래, 초미성 선교사의 글을 통해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간다.


▲초미성, 김덕래 선교사(왼쪽부터)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인가?
9/11 후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인가?”라고 우리에게 질문하였다. 꾸란은 폭력을 테러리즘을 허락하는가? 자살테러는 누가 하는 것이며 왜 하는 것인가? 등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에 나와 대담하는 무슬림들은 한결같이 모두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한다. 얼마 전 이슬람 퍼스펙티브 세미나에 방문한 모스크의 이맘(이슬람 지도자)도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거듭 말하였다.

우리가 살던 파키스탄에서 만난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우리처럼 평범한 이들이었다. 없는 자들은 먹고 사는 일에 허덕였고 부자는 가난한 자가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는 모습이었다. 부모들은 늘 자식 걱정으로 연연했으며 청년들은 내일의 꿈을 위해 준비하기 바쁜 모습이었다. 결혼식이 되면 알록달록하고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밤새도록 즐겼고 결혼식에 참석한 우리는 늘 귀빈 대우를 받곤 하였다. 우리 딸들의 친구 부모들 중에는 현지 의사들도 있었는데 우리 건강에 문제가 있을 때면 밤 늦게라도 달려와 도움을 주곤하였다.

물론 우리가 살던 도시가 항상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종족간에, 같은 무슬림들끼리 겪는 분쟁, 쿠테타도 겪어 보았다. 투쟁이 심할 땐 아무도 거리에 나가지 못한 채 잠잠히 집 안에서만 있어야 했고 이를 대비해 우리는 항상 아이들 우유 등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곤 했다. 한국에서 유신 정권에 있어 보았고 광주 사태로 마비된 도시에도 있어 보았던 우리에게 파키스탄은 과도기에 있는 여느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웠다.

따라서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가 단순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도 종교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의 피를 보았는가? 지금도 기독교인이 세계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저지르는 죄를 보고 들을 때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도 비기독교인에게 묻는다면 그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또 그의 답은 얼마나 정확하며 객관적일 수 있을까?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인가? 이슬람은 단면으로만 볼 수 없는 여러 면이 존재하는 종교이다.

1. 이슬람의 평화 개념
이슬람에서 평화는 인간이 알라에게 무조건 항복하며 순종하는 것에서 온다고 말한다. 무슬림들의 인사인 “아살라와레꿈(평화가 당신에게 임하시기를)"에도 평화라는 의미의 '살람'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다. 이슬람이라는 단어는 복종, 항복이라는 뜻이고 무슬림은 항복하는자, 순종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 어원에는 ‘평화’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에 혹자는 이슬람이 평화라는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복종을 통한 평화의 축구는 계급과 인종, 피부색과 빈부를 초월한 모든 인류의 공통의 목표라고 말한다. 이는 나아가 형제애라는 인류의 평등의식을 고양시킨다.

이 땅을 창조하고 전지전능한 알라의 모든 명령과 계명에 온전히 순종할 때 진정한 평화가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행하는 모든 율법적 행위들은 그를 명한 알라의 뜻이고 그 알라의 뜻에 순종하면 알라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갖고 그렇지 않으면 알라의 진노를 사게 되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알라의 계시인 꾸란에 적힌 것을 행함이 알라를 기쁘게 하여 그로 인해 이 세상도 평화로워진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알라를 따르는 무슬림으로 채워져 이 지구가 알라의 법, 이슬람 법 아래 지배되어야 함이 알라의 뜻이며 진정한 평화를 향한 길이라고 무슬림들은 말한다.

2. 무하마드와 이슬람의 확장
무하마드가 처음 알라로 부터 계시를 받았을 때 메카에 있는 아랍인들은 그를 조롱하고 무시하였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즐기던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삶을 버리라는 메시지였기에 무하마드는 그들에게 매우 불편한 인물이 되어 핍박을 받곤 하였다. 무하마드는 겸손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고 선행을 베풀기 좋아하는 경건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흔히 '무슬림들은 선하고 경건하다'라고 표현하는 모습의 근거가 바로 무하마드 초창기의 모습에 있었다. 그는 평화의 종교를 가르쳤고 이 시절 그의 모습을 담고 있는 하디스(무하마드의 가르침이 실린 책)에서 그의 평화로운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무하마드는 처음에는 유대인, 기독교인 또는 이방인들이 이슬람을 받아 들이도록 무력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적대하는 자가 많아짐에 따라 군대를 소집하였고 이 때 이슬람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해 싸우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선포하였다. 알라의 이름으로 전쟁을 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하마드의 군대가 승리한 곳에 이슬람을 따르겠다는 자에게는 보호해 주고 그렇지 않은 자는 조세를 내거나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당시 무하마드가 제시한 '평화'요 '관용'이었다. 비무슬림들은 모두 완전히 '복종'케 하라는 꾸란 구절(9:29)이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엔카르타 백과사전에 보면 이슬람의 급진적 확장은 군대를 통한 정복이었다. 무력으로 아라비아 반도를 이슬람화 시켰으며 이슬람을 위해 죽은자는 천국의 구원을 약속하였고 정복에 성공한 자에게는 부를 허락하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군사적이고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이 신흥 종교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센터에서 발행하는 책자를 보면 이슬람이 결코 무력에 의해 확장되지 않았음을 공공연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슬람을 알리는 웹사이트 등에는 항상 이런 질문이 있다.

"이슬람을 적대하는 자들은 이슬람이 무력으로 그 세를 확장하였다는데 답은 무엇인가?" 재미있게도 그 답은 이렇게 나와 있다. “이슬람은 이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증거와 확증으로 확장했으나 이슬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받아들일 때까지 힘과 무력을 통해 정복하였다.”라고 말이다.

3. 이슬람의 세계관
이슬람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를 '평화의 집(Dar-Es-Ssalam)' 과 '전쟁의 집(Dar-Al-Harb)'으로 분리한다. 여타의 종교를 물리치고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 공동체(움마)를 이루어 이슬람의 법(샤리아)으로 다스림 받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모든 무슬림들은 평화의 집안에 있으니 평화롭고, 모든 비무슬림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무력으로라도 복종시켜야 하므로 '전쟁의 집’에 거하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이슬람으로 돌아올 때까지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4. 지하드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인가?'에서 또 간과할 수 없는 개념이 바로 지하드이다. 원래 지하드의 뜻은 '노력하다. 애쓰다'이다. 꾸란에 의하면 알라의 길을 가고자 애쓰며 노력한다는 뜻으로 지하드가 표현되어 있다. 이는 큰 의미의 지하드로 알라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간다는 뜻으로 본다. 세상의 악에 굴복하지 않고 선하게 살고, 선행을 베풀며 사회 개혁을 돕기 위한 인간의 고행같은 것이다. 기독교적 표현으로 '자기부인'같은 것이다.

작은 의미의 '지하드'는 불의와 업악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 특히 이슬람이 공격을 받을 때 지키기 위해 혹은 이슬람을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 이를 위해서라면 무력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거룩한 전쟁'으로 우리가 흔히 들어 알고 있는 지하드이다.

일반적으로 지하드는 모든 무슬림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행해야하는 의무로 알라의 뜻을 따라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며 교육이나 설교 등을 통해 이슬람 커뮤니티를 확장함을 말한다. 지하드는 어떤 공격으로부터 이슬람과 그 커뮤니티를 지키도록 싸우는 권리와 의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지하드” 선포는 이슬람을 방어토록 모든 무슬림들을 모으게 하는 힘이 되었다. 아프간의 무자히딘은 러시아 침략을 막기 위해 오랫동안 싸운 지하드의 한 예이다.

최근에는 강경 이슬람파는 모든 무슬림들이 이슬람 개혁과 혁명을 위한 “지하드”에 임하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주류 이슬람 행동파는 무슬림 권력과 번영의 회복은 “이슬람”으로 돌아가는것, 더 이슬람화된 사회와 국가로 돌아가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평화인가?
정리해 보면 이슬람이라는 커다란 머리는 평화라는 개념과 함께 있다. 이 평화는 알라의 명령에 완전히 순복할 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 알라는 이 땅이 모두 그를 따르는 무슬림들과 그의 법으로 지배되기를 원한다. 그 평화를 위해서라면 비무슬림을 무력으로라도 복종시켜야 하며 혹 이슬람에 위협이 되는 어떤 세력도 모두 창과 칼로 맞서 전쟁을 일으켜 대적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이 성립되면 왜 이 땅에 수많은 지역에서 아직도 기독교로 개종된 무슬림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혹은 처참하게 죽어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슬림이 이슬람이 아닌 종교로 배교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며 꾸란에서도 허용된 일이기에(샤리아법) 무슬림들은 스스럼 없이 살해를 감당하는 것이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테러나 폭탄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이 땅의 모든사람들이 다 이 평화의 집(또는 이슬람의 집)에 들어와 알라의 법대로 사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 위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는 이슬람은 종교가 아닌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그동안 무슬림들은 러시아, 스페인, 영국, 미국 등 많은 곳에서 테러를 일으켜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천진난만한 평화로운 무슬림을 기억하며 테러범들은 한 부류에 속한 극단주의 무슬림이기에 이슬람 전체를 비난하지 않는다.

여러해 전 우리가 살던 곳에 단기 선교팀이 다녀간 적이 있다. 아내와 두 딸만 있을 시간을 정확히 알고 강경파 무슬림들이 무장하여 집을 습격 받은 적이 두어 번 있었다. 피할 길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가족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극단주의자들을 탓했지 내 이웃에 사는 무슬림을 탓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우리 집에 습격한 테러범을 비난하며 우리를 걱정하였다. 과연 이들은 머리가 두 개인 이슬람일까 아니면 하나의 머리이지만 두 얼굴을 가진 이슬람일까?

진정한 평화란?
죄로 인해 하나님과 헤어진 인간은 죄의 대속이라는 사실없이 결코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모든 만물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정해 놓으셨읍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평화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골 1;20)

이슬람이 내세우는 평화는 진정 가능한 것인가? 이 땅의 모든 인간이 무슬림이 된다고 하여 평화의 왕국이 임할까? 심지어 같은 무슬림끼리도 죽이는 분쟁을 볼 때 이 땅에서 전쟁의 신음은 마지막 날 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모두 가슴에 품지 않는다면…

앞으로 세상은 '평화'라는 이름 아래 더 많은 피가 흘리게 될 것이며 이는 더 많은 무슬림들로 하여금 진정한 평화에 목 마르게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관계를 통한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한 그들을 가슴에 품고 아파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