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좋아했던 영화 배우 중에 푸레드 아스테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춥니다. 특히 탭댄스를 잘합니다. 저도 배워보고 싶었고 우리 딸에게 가르쳐 준적도 있습니다. 연기도 참 잘합니다. 그러나 1932년 그가 처음 데뷔하려고 연기 데스트를 받을 때 유명한 헐리웃 감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연기도 빵점, 노래도 제로, 춤은 초보수준이다.” 이렇게 평을 했습니다. (Quick Judge) 잘못된 판단으로 그 감독은 두고두고 그 말 때문에 부끄러워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본문은 바로 이러한 판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중에 자주, 강하게, 강도 높은 질책을 하신 죄를 꼽으라면 여러분은 어떤 것이라 생각을 하십니까? 간음? 외식? TV 보는 것? 술 마시고, 마약 하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가장 심하게 질책 하신 죄는 바로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죄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죄.(SELF RIGHTEOUSNESS) 우리는 어디서든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배운 자나 덜 배운 자나, 불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나 스스로 의로운 생각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치가나 거리의 행려자나, 심지어 목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죄에서 자유로울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죄를 지으면서 하는 말이 ‘나는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고 검사를 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핑계를 잘 대는 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인인가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또한 모든 죄의 리스트를 보면서 우리도 이러한 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인 필터를 우리의 심령에 만들어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저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어, 나는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야, 어디다 나를 그런데 넣고 비교해” 혹시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울은 오늘 본문 2장의 내용을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2장의 내용은 바로 도덕적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부도덕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유죄라는 것입니다.
1. 아무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권리는 없다.
이 단락의 Key 는 바로 판단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판단이라는 단어는 평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석하거나, 분별하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바로 정죄를 의미합니다. 판사가 죄인에게 선고를 하는 바로 그 죄의 선고를 의미 합니다. 즉 판단 한다는 것은 자신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므로 의롭지 못한 사람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자세를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스스로 의롭다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2:1-4에 4가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의 특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특성은 남은 정죄하면서 자신은 정당화 시킵니다. 남은 다 여기 속하지만 나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생각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우리가 남을 향해 손가락질 하면 세 손가락은 어디로 향하지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은 제외를 시킵니다. 헬라 속담에 "사람은 누구나 앞뒤에 하나씩 두 개의 자루를 메고 다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모아 담고 뒤에 있는 자루에는 자기의 허물을 주어 담는답니다. 뒤에 있는 자루는 보이지 않으니까 앞에 있는 자루에만 남의 허물을 잔뜩 집어넣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앞에 있는 자루에 계속 집어넣는데도 앞이 무거워 넘어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뒤에 있는 자루에 언제나 자기 허물이 들어갈 자리도 없이 꽉 차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위선이라는 말은 후포크리테이스- uJpokriths- 여기서 영어의 Hypocrite- 이란 말이 나왔고 이 말뜻은 배우가 스테이지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 아니면 사실과 현실이 맞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지요. 즉 일관성이 결여된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위선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 이러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을 통렬히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교만 중에 가장 최악은 바로 종교적 교만일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너 보다는 의롭다..그래서 너를 정죄할 수 있다 이런 생각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죄들을 보면서 판단하지만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최소기준 준수를 가지고 최고의 경건한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보이지 않는 전통과 기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판단합니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 같으면 어떻게 집사가, 구역장이, 장로가 그렇게 할 수가 있어 분노하며 심판을 하게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최소 수준을 술과 담배로 보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 라인을 범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 안에 생명력과 신앙의 본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더 심각한 것은 바로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생각입니다.
누가복음18장 9-14절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이 '따로 서서' 기도합니다. "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 즉 토색( 욕심이 많음 ),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합니다. 최소 기준준수를 말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셨습니까? 하나님 앞과 말씀 앞에서 자신을 깊이 있게 살펴본 세리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성찰은 잊고 살면서 남의 허물을 지적해 내는 데에는 얼마나 빠르고 통렬한지 모릅니다. 제가 다닌 중학교는 경희 중학교인데, 남녀공학은 아니라도 한 캠퍼스 안에 남녀 중, 고등학교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한참 이성에 대하여 예민할 때 아닙니까?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서로 간에 러브레터를 비밀스럽게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각이 되면 정학 또는 근신처분을 받습니다. 학교 주변 잡초를 뽑고, 학생 주임실에서 손들고 벌을 받으며 반성문을 쓰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도 학우들은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문제아라고 하면서 다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물론 저도 그랬지요. 그러면 저는 이성에 대한 동경심들이 없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도 있었습니다. 단지 용기가 없었고, 그러면 사회적 체면, 선생님과 부모님에 대한 기대심을 버리지 못하여 하지 않았을 따릅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직접적으로 짓지 않았더라도 생각으로 공감을 하고 은근히 선망 했다면 우리도 같은 죄를 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계속)
예수께서 공생애 중에 자주, 강하게, 강도 높은 질책을 하신 죄를 꼽으라면 여러분은 어떤 것이라 생각을 하십니까? 간음? 외식? TV 보는 것? 술 마시고, 마약 하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가장 심하게 질책 하신 죄는 바로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죄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죄.(SELF RIGHTEOUSNESS) 우리는 어디서든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배운 자나 덜 배운 자나, 불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나 스스로 의로운 생각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치가나 거리의 행려자나, 심지어 목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죄에서 자유로울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죄를 지으면서 하는 말이 ‘나는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고 검사를 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핑계를 잘 대는 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인인가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또한 모든 죄의 리스트를 보면서 우리도 이러한 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인 필터를 우리의 심령에 만들어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저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어, 나는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야, 어디다 나를 그런데 넣고 비교해” 혹시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울은 오늘 본문 2장의 내용을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2장의 내용은 바로 도덕적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부도덕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유죄라는 것입니다.
1. 아무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권리는 없다.
이 단락의 Key 는 바로 판단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판단이라는 단어는 평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석하거나, 분별하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바로 정죄를 의미합니다. 판사가 죄인에게 선고를 하는 바로 그 죄의 선고를 의미 합니다. 즉 판단 한다는 것은 자신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므로 의롭지 못한 사람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자세를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스스로 의롭다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2:1-4에 4가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의 특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특성은 남은 정죄하면서 자신은 정당화 시킵니다. 남은 다 여기 속하지만 나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생각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우리가 남을 향해 손가락질 하면 세 손가락은 어디로 향하지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은 제외를 시킵니다. 헬라 속담에 "사람은 누구나 앞뒤에 하나씩 두 개의 자루를 메고 다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모아 담고 뒤에 있는 자루에는 자기의 허물을 주어 담는답니다. 뒤에 있는 자루는 보이지 않으니까 앞에 있는 자루에만 남의 허물을 잔뜩 집어넣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앞에 있는 자루에 계속 집어넣는데도 앞이 무거워 넘어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뒤에 있는 자루에 언제나 자기 허물이 들어갈 자리도 없이 꽉 차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위선이라는 말은 후포크리테이스- uJpokriths- 여기서 영어의 Hypocrite- 이란 말이 나왔고 이 말뜻은 배우가 스테이지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 아니면 사실과 현실이 맞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지요. 즉 일관성이 결여된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위선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 이러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을 통렬히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교만 중에 가장 최악은 바로 종교적 교만일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너 보다는 의롭다..그래서 너를 정죄할 수 있다 이런 생각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죄들을 보면서 판단하지만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최소기준 준수를 가지고 최고의 경건한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보이지 않는 전통과 기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판단합니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 같으면 어떻게 집사가, 구역장이, 장로가 그렇게 할 수가 있어 분노하며 심판을 하게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최소 수준을 술과 담배로 보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 라인을 범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 안에 생명력과 신앙의 본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더 심각한 것은 바로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생각입니다.
누가복음18장 9-14절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이 '따로 서서' 기도합니다. "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 즉 토색( 욕심이 많음 ),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합니다. 최소 기준준수를 말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셨습니까? 하나님 앞과 말씀 앞에서 자신을 깊이 있게 살펴본 세리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성찰은 잊고 살면서 남의 허물을 지적해 내는 데에는 얼마나 빠르고 통렬한지 모릅니다. 제가 다닌 중학교는 경희 중학교인데, 남녀공학은 아니라도 한 캠퍼스 안에 남녀 중, 고등학교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한참 이성에 대하여 예민할 때 아닙니까?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서로 간에 러브레터를 비밀스럽게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각이 되면 정학 또는 근신처분을 받습니다. 학교 주변 잡초를 뽑고, 학생 주임실에서 손들고 벌을 받으며 반성문을 쓰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도 학우들은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문제아라고 하면서 다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물론 저도 그랬지요. 그러면 저는 이성에 대한 동경심들이 없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도 있었습니다. 단지 용기가 없었고, 그러면 사회적 체면, 선생님과 부모님에 대한 기대심을 버리지 못하여 하지 않았을 따릅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직접적으로 짓지 않았더라도 생각으로 공감을 하고 은근히 선망 했다면 우리도 같은 죄를 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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