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중세 이전의 지금의 이란지역의 제국인 페르시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대사에서 성경에 그 이름을 남긴 고레스왕에 의해 세워진 페르시아(한글성경의 바사)가 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지금의 중동지역 전체와 소아시아 반도, 그리고 이집트까지 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페르시아는 알렉산더가 이끄는 헬라군대에게 망하였습니다. 이어서 그 지역은 알렉산더의 죽음과 함께 나뉘었는데 이집트와 팔레스틴의 일부는 알렉산더의 부하 프톨레미가 다스리는 이집트가 되고, 지금의 시라아와 이라크, 그리고 이란 영토는 셀류쿠스에 의한 시리아왕국의 영토가 됩니다. 페르시아제국의 본토인 지금의 이란영토가 시리아왕국의 지배하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지금의 이란지역에서 새로 일어난 파르티아(한글성경의 바대) 왕국은 시리아로부터 그 영토의 일부를 회복하였습니다.

파르티아는51~122년 중앙권력의 약화로 몇몇 군소국가로 점진적 분열양상을 보이다가 1세기 들어 북부 11개와 남부 7개 등 18개 군소왕국으로 분열되었지만 중앙정부의 명맥은 유지되었습니다. 이후 1세기말경에 파르티아 왕국에서는 잦은 왕권다툼이 일어나 두 사람의 왕이 동시에 등장하거나 왕위 잠칭자의 도전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로마 제국과의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극도로 소모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은 165년과 194년, 즉 불과 30년 사이에 2번이나 로마군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물론 파르티아도 복수전을 전개하여 로마의 영토를 침입하여 여러 도시를 초토화시켰으므로 국가 재정의 파탄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산 가문의 아르다시르(Ardashir)가 224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파르티아는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새 왕조는 아르다시르 1세의 선조인 사산(Sasan)의 이름을 따서 고대 페르시아와 구별하여 사산왕조의 페르시가 되었습니다. 사산인들은 아르다시르 1세(224~241 재위)의 지휘 아래 파르티아인들을 멸하고 제국을 세웠는데, 서쪽으로는 로마에 대응하고 동쪽으로는 쿠샨 왕조와 에프탈족에 대응하여 그 영토가 끊임없이 변화했습니다. 사산 왕조의 통치하에서 이란의 민족주의가 부활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가 국교로 인정되었으며 다른 종교의 지지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공공연히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특히 기독교 국가인 로마와의 전쟁으로 페르시아 내의 기독교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3세기 중반 이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변의 아람어 사용공동체에서 추종자가 많았습니다. 로마 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는 사산 왕조는 기독교에 대하여 관용했으나 마니교(Manichaeism)나 그노시스교(Gnosticism)에 대해서는 적대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점차 기독교화된 339년 이후 기독교인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기독교는 사산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호르미즈드(Hormizd) 4세(579~590 재위)는 비잔틴제국과 평화협상에 실패했지만, 기독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그의 아들 호스로우(Khosrow) 2세에까지 이어져 결국 조로아스터교도들의 반란을 야기시켰습니다. 호스로우 2세는 콘스탄티노플로 도피했으며, 로마 황제 마우리키우스(Mauricius)의 도움으로 591년 다시 페르시아의 왕위에 올라 그의 통치기간 안에 번영을 누렸습니다.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사산 왕조의 세력은 쇠퇴했고, 이슬람화된 신흥 아랍족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사산 왕조의 최고지휘관 루스탐이 전사했으며, 마지막 왕 야즈데게르드(Yazdegerd) 3세도 651년에 암살되므로서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