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앙을 지키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노방전도하시는 분들을 보고, 공중파 방송들의 기독교 비판 다큐멘터리를 보고, 아주 가끔 등장하는 목회자들의 사건사고 소식을 듣고, 주위 사람들은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해명을 요구한다.

나 하나 믿음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데, 어찌 그들을 위해 변호할 수 있단 말인가? 변명과 말 돌리기도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많은 오해와 불신, 일부 목회자들의 부패와 추문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여전히 믿을 만한 것일까?’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우연히 본 연극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포스트모던 문화와 사회 제도, 기독교에 대해 전세계를 돌며 강의하고 있는 더그 패짓(Doug Pagit) 목사가 이 물음에 답했다. 그가 쓴 <여전히 믿을만한 기독교(A Christianity worth Believing)>를 통해서다.

더그 패짓은 책을 통해 크게 두 가지 주장을 펼친다. 지금 우리가 믿는 ‘기독교(예수님이나 하나님 말고)’는, 너무 ‘헬라화‘됐고 지나치게 ‘죄’가 강조됐다는 것이다.

마케팅·심리학이 아니라 ‘그리스’에 물들었다

먼저 패짓은 기독교가 ‘그리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의 이야기였다고 말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듯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돼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집중됐고, 결국 회의를 열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후 이방인 회심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당시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곳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문화적인 연합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문화와 세계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히브리 세계관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그리스 세계관이었다. 이들을 전도하기 위해 이들의 생각과 판단으로 설명했던 것이 고착화된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유대인이 돼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식 사고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현대 기독교에까지 이어졌다. 저자는 “현대 교회를 이끄는 신학 대부분이 4-5세기 그리스·로마인들을 위한 믿음이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모든 신학은 그 시대를 반영할 수 밖에 없는데, 우리는 5세기의 상황에 현실을 끼워넣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어거스틴이 있다. “하지만 그런 신학을 요구하던 세계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오늘날 우리가 같은 신학을 고집한다면 이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라, 그 시대에는 그의 신학이 최선이었지만, 지금은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시대는 영지주의와 마니교로 대표되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설이 강한 때였고, 그는 이에 맞서야 했다.

마틴 루터가, 존 칼빈이, 존 녹스가 했던 일은 바로 이러한 어거스틴의 신학을 자신의 시대에 자신이 디디고 있는 땅에 맞춰 조정한 일이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교회 개혁’이었다.

저자는 “역사는 국교가 기독교 발전에 걸림돌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주장한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순간 그리스·로마식 믿음이 히브리식 믿음을 덮어버렸다는 설명. 저자는 “제국이 가져온 제도와와 강제력은 복음의 메시지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들을 이해하도록 돕고자 했던 설명이, 오히려 그들을 삼켜버린 꼴이다.

하나님은 ‘저 위 그리고 저 바깥에’ 계신 분일까

가장 대표적인 예는 ‘죄’에 대한 설명이다. 전도할 때 가장 애용하는 사영리 설명 그림으로 저자는 이야기를 해 나간다. 협곡의 왼쪽에는 사람이, 오른쪽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됐으며,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 닿을 수 없다. 하지만 커다란 십자가가 협곡 틈에 다리를 놓고, 문제가 해결되는 그림 말이다. 저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을 이런 식으로 묘사하다니, 너무 이상한걸! 창조주가 협곡 한편에 갇혀 계시다니 말야!’. 더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도 없으신 듯 했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하지만 저자는 알게 된다. 하나님은 ‘저 위 그리고 저 바깥에’ 계신 분이 아니라, ‘이 아래 그리고 이 안에’ 계신 분임을.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시고(omnipotent), 무소부재하시며(omnipresent), 전지하신(omniscient)’ 분이라 배워왔다.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표현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식 세계관에 기초한 이런 언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새끼를 보호하는 독수리(신 32:11)’, ‘유모(살전 2:7)’, ‘새끼를 모으는 암탉(마 23:37)’ 등으로 ‘이상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을 함께 느끼시거나 백성들의 삶에 친밀히 관여하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을 훌륭한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바꿔버리는 시도”라며 비난받기 일쑤이고, 하나님의 실제 본성과는 상관없는 시적 언어일 뿐이라고 배워왔다.

저자는 “우리 기독교 문화에 굉장히 침투해 있는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망쳐왔다”고 폭로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 오해가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해롭고 위험한 신학적 과실 중 하나였다고까지 얘기한다.

죄는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

‘협곡의 하나님’ 신학에서 멀어진다면 죄에 대해 관대해지리라 믿어서 협곡을 그려넣은 사람들에게, 저자는 거리적인 표현보다 ‘분열’에 대한 표현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틀어진 관계, 그래서 통합이 필요한 관계 말이다. 우리가 협곡의 다리를 건너기에 충분히 깨끗해져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전부터 내 삶에 관여하고 계셨고, 그 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떠한지 이해하고 함께하자고 하시는 그 분의 초청을 이해한 순간이다.

구원을 강조하기 위해, 교회는 죄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뿌리깊은 ‘내재된 부패’의 신학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만드신 ‘신묘막측한 존재’로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죄를 다스리기 위해 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 산다. 죄가 극심할 때 우리는 죄에 대처해야만 한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죄에 대처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이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며, 하나님과 완벽하게 연합해 있던 아담과 하와가 나무의 과실을 먹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협력을 벗어나 행동했고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 분열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의 통합과 협력, 연결을 위해 창조됐으니 죄와 파괴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하나님과 조화를 이뤄 살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