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잠언 29:18-킹제임스 성경).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전성기인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현대인들의 가치관이 흔들리면서 심하게 방황하고 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대인이다.

모두가 좋은 교육을 받았고, 훌륭한 능력과 자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좌표와 자신감을 잃고 정체성이 표류하고 있다. 그 여파로 고귀한 에너지를 술 취하고 방탕하고 물질문명의 쾌락을 사랑하는 일에 쏟아 붓고 낭비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상을 본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내일에 대한 꿈의 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류의 진짜 위기는 지하자원의 고갈이 아니다. 영적 자원과 꿈 자원의 고갈이다. 독일의 경제학자 리스트(F. List)는 “영적 자원의 부흥 없이 경제적 부흥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경은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사상가 미셀 몽테뉴는 “꿈과 목적이 없이 항해하는 사람은 바람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방황하는 인생을 다시 세우려면 잃어버린 꿈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꿈을 상실하고 절망에 이르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 죽고 가고 있는 사람을 살리려면 강력 처방이 필요하다. 꿈도 미지근하면 안 된다. “강렬한 꿈 ”이 필요하다. 계시록 3장 16절에 보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토하여 내치겠다”고 말씀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려면 뜨거운 열정에다 강한 헝그리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바울을 보라. 로마로 향하여 목숨을 건 강렬한 선교의 꿈이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중국 내지선교회를 창립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의 뜨거운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후에 828명의 선교사가 중국에들어와 사역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강렬한 헌신이 이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하나님은 왜 무디를 들어 쓰셨는가?”

작년 가을에 교계(敎界)의 책임 맡은 일이 있어서 필라델피아 지역에 있는 목회자 50여분을 모시고 무디(D. L. Moody) 생가(生家)인 매사추세츠 노스필드(Northfield)에 다녀왔다. 거기 가서 보았더니 무디가 사역하던 때의 모든 유적과 유물이 현장에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들이 많이 낡아지긴 했으나, 150년 전에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불꽃같이 타올랐던 그 때의 부흥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뜨거워졌었다.

무디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목사였다. 학교 공부라고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는 동역자 토레이(R.A. Torrey)목사와 함께 미국 제3차 대 각성 운동(The Third Great Awakening)의 주역으로서 천만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고 수 백 만 명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미국 교회 부흥사(復興史)에 큰 족적을 남겼다.

“무디의 열정“

그러면 하나님은 왜 무디를 그 시대의 큰 부흥사로 들어 쓰셨는가? 복음 전도와 영혼 구원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순수함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일까? 자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젊음과 물질과 시간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치는 자기 희생의 사람이다. 무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쓰신 것이다.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무디처럼 못 배워도 좋다. 촌스러워도 좋다. 배경이 없어도 좋다. 주일학교 교사 같은 작은 사명이라도 좋다. 강렬하고 뜨거운 꿈을 품어라. 강하고 뜨거운 사명감으로 주님을 위한 소원을 불같이 일으켜라.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쓰신다.

“장인과 장이”

강렬한 꿈을 꾼다는 것은 오늘의 빵 이상의 것을 구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빵만을 구하면 빵도 못 얻게 되지만, 빵 이상의 것을 구하면 빵은 저절로 얻어진다. 강렬한 꿈을 꾼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꿈꾸는 것이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요, 남이 가지 못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릇을 만드는 도공(陶工)을 자세히 살펴보라. 두 종류가 도공이 있음을 손쉽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내일의 꿈이 없는 도공이다. 내일의 꿈이 없는 도공은 같은 진흙을 가지고 항아리만 만든다. 눈앞에 당장 보이는 빵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꿈이 있는 도공이다. 내일의 꿈을 꾸는 도공은 몇 개월 쓰고 내다 버리는 항아리에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똑같은 진흙을 가지고 항아리를 만들기 보다는 청자와 백자를 만든다. 눈앞의 빵보다는 빵 이상의 것을 구하며, 당장의 이익보다는 후대에 남길 최고의 걸작품을 만드는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청년들에게 고한다. 너무 쉬운 출세만 꿈꾸지 말라. 가는 길이 좀 힘이 들어도 장인(匠人)처럼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장인처럼 산다는 것은 꿈을 가지고 산다는 말이요, 인생을 질(質)로 승부한다는 말이요, 후세에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남기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산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절대 조심하라. 양(量)으로만 사는 인생은 언젠가는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경제 불황과 IMF 사태가 왜 왔나? 양만 생각하느라고 질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침체기가 왜 왔나? 교회의 부흥을 양적 개념으로만 보고 성도들을 질적으로 양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건물이 유럽교회처럼 관광지가 되지 않으려면 양보다는 질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이 회복되어져야 한다. 한번 밖에 기회가 없는 이 고귀한 삶을 무엇으로 살려는가? “장인”의 삶인가? “장이”의 삶인가? 질인가? 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