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현대인은 현대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것은 스트레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쌓이면 병이 된답니다.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병입니다. 흔히 스트레스 하면 힘들고 괴로운 일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좋은 일에도 생기고, 궂은일에도 가릴 것 없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에서 생긴다고 합니다. 예컨대 결혼, 승진 등 일생에 기쁜 일도 알고 보면 스트레스가 된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장기나, 심장, 위장이 심한 충격을 받는답니다. 심장이 빨리 뛰거나, 혈압이 오르거나, 소화가 안 되거나, 이런 일은 누구나 다 겪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승진한 그 해는 집을 사는 것을 다음 해로 미루는 것입니다. 이혼한 사람이나 사별한 사람은 재혼을 그 다음 해로 미루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스트레스 매니지먼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날마다 많은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 요인을 조사한 어떤 통계를 소개합니다. 스트레스도 그 수치가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정신과의 자료에 따르면 그 수치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1.자식 사망(74) 2.배우자 사망(73) 3.부모 사망(66)) 4.이혼(63) 5.형제 사망(60) 6.해고나 파면(50) 7.친한 친구의 사망(50) 8.결혼 (50) 9.결혼 약속(44) 10.중병이나 증상(44) 11.정년퇴직(41) 12.임신(37) 13.입학이나 취직(37) 15.가출이나 군대 간 자식의 귀가(36) 16.가족 중에 환자 발생(35) 17.주택이나 부동산 구입(35) 18.시댁이나 처가, 일가친척과의 불화(34) 19.학업의 시작이나 중단(34)

그런데 한 해에 200점 이상이면 병에 걸릴 위험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제가 왜 이런 긴 설명을 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우리는 이런 사람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을까? 근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싫어하시는 일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만약에 본문에 나오는 이런 일을 계속하면 정말 스트레스는 우리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부끄러운 세대입니다. 이 시대는 병든 사회입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정상이 아닙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 시대는 극히 난폭합니다. 도덕적 기준도 없습니다. 곳곳에 전쟁과 테러가 있습니다. 핵 문제로 지금은 세계가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를 보십시오. 어디에 참 평화가 있습니까. 그럼 그러한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서 올까요?

오늘 본문에 바로 그 이유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로마서 1장 29절부터 31절 사이에 나타나는 21가지의 죄악. 이것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보낼 그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죄는 인류 역사를 통해서 로마 시대나 고대 사회나 중세 사회나 근세 사회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대 사회에서조차 이 21가지 죄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이 죄는 더 심화되어서 모든 인류가 이 죄악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하루 저녁에 TV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들을 모니터해 본다면 오늘 여기에 나오는 모든 죄악이 각 TV방송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죄라는 생각이 듭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기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그리고 인간들 앞에 합당치 못한 죄악을 저지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죄악의 늪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자신을 성결하게 세워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의 결과가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아타나는 것입니다.

1.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29절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들)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그랬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의는 우리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도덕한 일들을 개괄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29) peplhrwmevnou" pavsh/ ajdikiva/ ponhriva/ pleonexiva/ kakiva/, mestou;" fqovnou fovnou e[rido" dovlou kakohqeiva", yiquristav" ‘추악‘ 이라는 말은 도덕적인 부패로 인해서 우리 인간사회에 끼치는 수많은 해독성을 의미하지만 어떤 번역 성경에는 이것을 성적인 방종 또는 불륜, 성적인 부도덕이라고 번역을 해놓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다음 등장하는 탐욕(pleonexiva) 은 불의한 일을 해서라도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분수를 뛰어넘는 욕심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욕심이라는 것은 합법적인 방법이나 절차에 의해 무엇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라고 본다면 탐욕은 불의한 일을 저질러서라도 무엇을 더 갖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이 탐욕을 절제하지 못해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고 마는 것을 성경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고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작은 욕심이 점점 자라서 이것이 탐욕이 되어 지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도 도무지 절제할 수 없고, 다스릴 수 없는 그런 욕심으로 발전해서 결국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짖게 하고 그 죄가 점점 자라서 죽음에까지 이른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쓴 글 가운데 어떤 욕심 많은 농부의 비극적인 죽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한 임금이 한 농부에게 그 농부가 하루 종일 걸어서 밟고 돌아온 땅을 다 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약속을 들은 농부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자기 땅을 넓히기 위해 넓은 땅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힘을 다해 걷고 달리고 걷고 달리면서 할 수 있는 대로 땅 한 뼘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땅을 밟고 임금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한 발자국이라고 더 밟아야 자기 땅이 더 넓어진다는 이 인간의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해가 넘어갈 무렵에 돌아온 그는 결국 지쳐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의 욕심은 바다를 메우고도 다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21가지의 죄를 우리가 죽 펼쳐 놓고 볼 때 내 자신은 여기에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악의(kakiva)- 모든 것을 악하게만 생각 하는 것 또 남을 악에 빠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21가지 죄를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나에게는 해당이 안 될지라도 내 자신이 빠질 수 있는 죄의 함정이고 덫이고 올가미라는 것을 우리는 금방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앞에 있는 4가지 죄악에 빠지면 따라서 또 다른 5가지 죄악이 따라옵니다.

2.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다 서로 연관이 되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글에 다음과 같은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마귀의 부하가 리비안 사막을 지나다가 성자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나는 한 수도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 마귀 부하는 성자가 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이 수도사를 유혹하고 타락시키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평안하고 얼굴에 평안이 넘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마귀의 부하는 음란의 유혹, 이 세상의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유혹을 다 동원해서 이 수도사를 시험에 빠뜨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목에게 가서 보고를 합니다. 이자는 제 상대가 아닙니다요..주인님..그래서 마귀 두목이 그 부하를 데리고 이 수도사에게 갑니다. 그리고 곁에 가서 귀에 대고 소곤소곤 몇 마디를 합니다. 그러자 이 수도사의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하면서 격한 감정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부하가 두목에게“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우리가 아무리 그를 유혹하고 미혹하고 쓰러뜨리려고 해도 안됐는데 그가 저렇게 얼굴색이 변하고 흥분을 하고 분노를 합니까?”물었더니 마귀 두목이 이렇게 딱 한마디만 말했다고 합니다.“자네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 주교가 되었네" 자기 동생이 대 주교가 되었다는 이 한마디에 깊은 수도의 경지에까지 들어갔던 이 수도사가 솟구쳐 오르는 시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허물어지는 그 장면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못되고 안 되는 건 괜찮은데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괴로워서 못 견디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 죄악은 우리 모두가 아주 사소하게 빠질 수 있는 죄악의 함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남을 칭찬에 인색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남이 잘 될 때에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남이 행복할 때에 나도 덩달아 좋아야 합니다. 이 사회는 남의 행복 때문에 배가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행복하고 다 같이 기쁨을 누리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