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초부터 뉴욕 중앙일보 사와 뉴욕 한인회가 협력하여 노동 사면자 배우자 초청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이 일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도 적극 협력을 약속한 가운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뉴욕과 뉴저지, 필라델피아, 코네티컷 등지에서 많은 사면자들이 신청을 했고, 나 역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되어 신청을 하게 되었다. 현실적인 사정으로 1차 상봉에 20명으로 제한하여 진행되었고, 이미 네 차례나 배우자 상봉이 이루어져서 그때마다 신문지상에 탑 뉴스로 다루면서 이산 가족의 애틋한 사연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드디어 제 5차 가족 상봉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다. 이미 한국에서는 여권 수속과 비자 수속을 밟고 있다고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동안 이 일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제야 이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를 드렸다.
1989년 3월 초 케네디 공항을 통해 20명의 배우자가 도착했다. 중앙일보 사와 뉴욕 한인회의 간부들과 이 프로젝트를 위해 수고하시는 유영수 사장님 외 관계자 여러분과 몇몇 동료들이 환영을 나왔고 뉴욕 타임즈를 비롯하여 많은 한국 신문 기자들과 보도진들이 열띤 취재를 하고 있었다.
어느덧 한 명, 두 명, 예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아내들이 출구로 나오기 시작했다. 서로들 반가움에 함박 웃음으로 맞이했다. 주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도 함께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눈이 빠지게 출구를 바라보던 내 눈에도 그렇게도 사모하며 그리워했던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달려나가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아내를 환영하겠다면서 함께 나온 미스바회 어른들이 곁에 계셔서 꾹 참았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한 걸음, 한 걸음 아내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나도 급기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뛰쳐나가 아내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 순간 눈물이 많은 아내의 울음보가 터졌다. 기쁨의 눈물인지 원망의 눈물인지 큰 소리로 울고 또 우는 것이었다.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연속으로 터지고 환영 나온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아내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아내를 끌어안은 내 가슴에 눈물의 진동이 심장을 파고들어왔다. 무정한 사람, 야속한 사람...... 원망과 한숨과 탄식이 응어리져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여보, 미안해. 미안해. 고생 많았지. 미안해. 미안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두 손으로 아내의 눈물을 닦아내며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우리는 기념 촬영을 마친 후 한인회관으로 가서 푸짐한 식사 대접을 받고 앞으로의 공식 스케줄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내가 오면 어떻게 하나 고민이 되었다. 내가 거처하는 가게 지하실은 출입하는 계단이 너무 위험하고 불편할 뿐만 아니라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교회 교육관에 전도사님이 기거하시던 작은 방이 비어 있는 것이 생각났다. 목사님께 사정 말씀을 드렸더니 선뜻 허락을 해주셨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미리 방을 준비해 주신 것이다. 미안하고 죄송하기도 했지만, 교회는 항상 나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아내는 조금 수척해 보였고, 손도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그 동안 전화로 통화할 때면 잘 지내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하니까 그러려니 했다. 무슨 일을 하길래 손이 이 모양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대답인즉 한동안 식당에서 일을 해 오다가 한 달 전부터는 교회가 건축을 시작했는데 아예 식당을 그만두고 교회에서 건축 일을 돕고 있다면서 한 달 내내 벽돌을 찍고 나르면서 열심히 일하다가 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정말 사랑하고 계시나 보다.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가 나왔다. 아내는 힘이 들지만 그래도 매우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라며 건축이 완성될 때까지 봉사할 것이라면서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1989년 3월 8일 자 중앙일보 사회면에 노동 사면자 배우자 상봉 기사 내용이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그 중에 특별히 나를 가족 상봉 100번째로 내세우고 나의 이민 생활의 애환을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룸메이트들과의 생활에서부터 감옥에 갔던 일이며 현재의 상황들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며칠이 지난 후 뉴욕 중앙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 출연 요청이 왔다. 나는 아내와 함께 방송국으로 갔다. 생방송으로 미국에 오게 된 동기부터 미국 생활 전반에 걸쳐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사회자는 신문에서 나의 기도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았다면서 신앙생활과 더불어 여러가지 미국 생활에 대한 질문을 해 왔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감옥에 갔다가 목사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로 나올 수 있었고 재판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은 일이며, 불법 체류자의 불안한 생활 등 여러 질문에 소상하게 대답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힘 주어 대답했다. 또 사회자는 아내에게 남편이 미국으로 간 뒤에 가장 어려웠던 때가 언제냐고 물었다. 아내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느새 아내의 눈가에는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니까 고통받는 아이를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하고 다댑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밤새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고쳐 주시더라고요."
아내의 말을 듣는 내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남편이 경찰에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심정이 어땠나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금식하면서 아이들과 함게 하루 빨리 풀려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정말 많은 교우들이 우리 가정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셨어요. 덕분에 빨리 나오신 것 같아요."
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뉴욕과 뉴저지 일원에 이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방송도 아닌데 꼭 신앙 간증과 같이 자연스럽게 방송이 나가고 있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나와 아내를 통하여 영광 받기를 원해서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인도하시며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렸다.
방송을 끝내고 스튜디오에서 나오니까 전화가 왔다면서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청취자 분께서 방송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면서 힘내라는 격려의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한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단체 관광으로 루러웨이 동굴을 구경하고 워싱턴을 거쳐 나이아가라 폭포도 구경했다. 아내도 나도 평생 처음 하는 관광 여행이었다.
회원들 중에는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나와 아내는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열심을 냈다. 아내가 미국에 체류하는 한 달 동안 아내와 나를 특별 대접해 주신 한인동산장로교회 여러 교우들의 따듯한 사랑의 손길과 아내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시고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뉴욕 중앙일보 사와 뉴욕 한인회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유영수 사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싶다.
다시 헤어져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나도 아내도 가까운 날의 만남을 고대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가운데 화이팅을 외치고 웃으면서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드디어 제 5차 가족 상봉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다. 이미 한국에서는 여권 수속과 비자 수속을 밟고 있다고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동안 이 일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제야 이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를 드렸다.
1989년 3월 초 케네디 공항을 통해 20명의 배우자가 도착했다. 중앙일보 사와 뉴욕 한인회의 간부들과 이 프로젝트를 위해 수고하시는 유영수 사장님 외 관계자 여러분과 몇몇 동료들이 환영을 나왔고 뉴욕 타임즈를 비롯하여 많은 한국 신문 기자들과 보도진들이 열띤 취재를 하고 있었다.
어느덧 한 명, 두 명, 예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아내들이 출구로 나오기 시작했다. 서로들 반가움에 함박 웃음으로 맞이했다. 주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도 함께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눈이 빠지게 출구를 바라보던 내 눈에도 그렇게도 사모하며 그리워했던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달려나가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아내를 환영하겠다면서 함께 나온 미스바회 어른들이 곁에 계셔서 꾹 참았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한 걸음, 한 걸음 아내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나도 급기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뛰쳐나가 아내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 순간 눈물이 많은 아내의 울음보가 터졌다. 기쁨의 눈물인지 원망의 눈물인지 큰 소리로 울고 또 우는 것이었다.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연속으로 터지고 환영 나온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아내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아내를 끌어안은 내 가슴에 눈물의 진동이 심장을 파고들어왔다. 무정한 사람, 야속한 사람...... 원망과 한숨과 탄식이 응어리져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여보, 미안해. 미안해. 고생 많았지. 미안해. 미안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두 손으로 아내의 눈물을 닦아내며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우리는 기념 촬영을 마친 후 한인회관으로 가서 푸짐한 식사 대접을 받고 앞으로의 공식 스케줄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내가 오면 어떻게 하나 고민이 되었다. 내가 거처하는 가게 지하실은 출입하는 계단이 너무 위험하고 불편할 뿐만 아니라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교회 교육관에 전도사님이 기거하시던 작은 방이 비어 있는 것이 생각났다. 목사님께 사정 말씀을 드렸더니 선뜻 허락을 해주셨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미리 방을 준비해 주신 것이다. 미안하고 죄송하기도 했지만, 교회는 항상 나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아내는 조금 수척해 보였고, 손도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그 동안 전화로 통화할 때면 잘 지내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하니까 그러려니 했다. 무슨 일을 하길래 손이 이 모양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대답인즉 한동안 식당에서 일을 해 오다가 한 달 전부터는 교회가 건축을 시작했는데 아예 식당을 그만두고 교회에서 건축 일을 돕고 있다면서 한 달 내내 벽돌을 찍고 나르면서 열심히 일하다가 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정말 사랑하고 계시나 보다.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가 나왔다. 아내는 힘이 들지만 그래도 매우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라며 건축이 완성될 때까지 봉사할 것이라면서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1989년 3월 8일 자 중앙일보 사회면에 노동 사면자 배우자 상봉 기사 내용이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그 중에 특별히 나를 가족 상봉 100번째로 내세우고 나의 이민 생활의 애환을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룸메이트들과의 생활에서부터 감옥에 갔던 일이며 현재의 상황들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며칠이 지난 후 뉴욕 중앙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 출연 요청이 왔다. 나는 아내와 함께 방송국으로 갔다. 생방송으로 미국에 오게 된 동기부터 미국 생활 전반에 걸쳐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사회자는 신문에서 나의 기도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았다면서 신앙생활과 더불어 여러가지 미국 생활에 대한 질문을 해 왔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감옥에 갔다가 목사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로 나올 수 있었고 재판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은 일이며, 불법 체류자의 불안한 생활 등 여러 질문에 소상하게 대답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힘 주어 대답했다. 또 사회자는 아내에게 남편이 미국으로 간 뒤에 가장 어려웠던 때가 언제냐고 물었다. 아내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느새 아내의 눈가에는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니까 고통받는 아이를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하고 다댑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밤새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고쳐 주시더라고요."
아내의 말을 듣는 내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남편이 경찰에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심정이 어땠나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금식하면서 아이들과 함게 하루 빨리 풀려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정말 많은 교우들이 우리 가정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셨어요. 덕분에 빨리 나오신 것 같아요."
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뉴욕과 뉴저지 일원에 이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방송도 아닌데 꼭 신앙 간증과 같이 자연스럽게 방송이 나가고 있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나와 아내를 통하여 영광 받기를 원해서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인도하시며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렸다.
방송을 끝내고 스튜디오에서 나오니까 전화가 왔다면서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청취자 분께서 방송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면서 힘내라는 격려의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한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단체 관광으로 루러웨이 동굴을 구경하고 워싱턴을 거쳐 나이아가라 폭포도 구경했다. 아내도 나도 평생 처음 하는 관광 여행이었다.
회원들 중에는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나와 아내는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열심을 냈다. 아내가 미국에 체류하는 한 달 동안 아내와 나를 특별 대접해 주신 한인동산장로교회 여러 교우들의 따듯한 사랑의 손길과 아내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시고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뉴욕 중앙일보 사와 뉴욕 한인회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유영수 사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싶다.
다시 헤어져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나도 아내도 가까운 날의 만남을 고대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가운데 화이팅을 외치고 웃으면서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JFK 공항에 도착한 노동 사면자 배우자들 ©하나님 큰 일 났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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