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1-8).

유명한 포도나무의 비유(比喩)이다. 예수님은 심오한 영적 교훈을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포도나무를 소재로 삼았다. 이것은 인생을 배려하는 그의 사랑과 겸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 우아한 비유를 읽을 때 마다 예수님의 사랑의 속성을 금방 알아챌 수 있고 우리의 마음은 주저 없이 예수께로 달려가게 된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하려는 비유의 핵심은 과정(過程)에 관한 것이다. 탁월함에 이르는 과정, 풍성함에 이르는 과정, 성결에 이르는 과정, 한 가지 목표에 몰두하는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과정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일까?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70년이 걸렸습니다.”

어느 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파리의 시내를 걷고 있을 때 였다. 길 건너편에서 그를 알아본 한 귀부인 쫓아와 초상화 한 장을 부탁했다. 피카소가 그 자리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부인이 “사례는 드리겠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피카소는 그 열성에 감탄되어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 주겠다고 동의했다.

잠간 의자에 앉아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벌써 그를 알아 본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어서 그림을 완성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그림을 완성한 피카소는 그 부인에게 그림을 건네주면서, “그림 값은 5천 프랑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짐짓 놀라면서, “피카소 선생님, 몇 분 동안에 그린 그림치고는 5천 프랑은 너무 비싼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피카소는 “부인, 부인께서는 큰 착각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70 평생이 걸렸다오.”

그렇다. 비록 일생의 한 작은 부분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지 라도 그건 그 사람의 일부분이 아니다. 그건 그 사람 전 존재의 투영이며 전 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떤 결과에 대해서 그건 그 순간의 산물이라고 얘기 헤서는 안 된다. 타이거 우즈가 매스터즈(Masters) 대회에서 우승했다면 그건 32년 전 생애의 결과이지 그날 하루만의 결과가 아니지 않은가?

영국이 낳은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Charles Spurgeon)에게 어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는데 일주일에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느냐고 물었다. 그 목사는 10시간 혹은 15시간 같은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스펄전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설교 하나를 준비하느라고 평생이 걸렸습니다.”

파란 만장한 긴 세월과 함께한 오래 된 포도나무의 표면은 아름답지 않다.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검은빛 깊은 굴곡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볼품도 없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그 표면을 가만히 바라보라. 정 반대의 생각과 느낌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건 볼품없는 껍데기가 아니라 오랜 세월의 과정 속에서 얻어진 고뇌의 면류관이며 지혜의 연륜(年輪)이라는 것을 알게 헤 준다.

그리고 그건 그 험난한 고난의 과정으로 얻어진 노고를 열매에 담아 인간과 자연에게 되넘겨 주고 있는 이타주의자의 사랑의 흔적으로 보인다. 그러니 포도나무의 겉모습을 보고 감동과 감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우리네 인생의 과정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도 아닐 것이다.

“과정(過程)은 결과를 이끈다.”

그렇다. 그래서 포도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정은 결과를 이끈다.”는 큰 명제를 얻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농부가 다양한 과정을 통하여 포도나무를 다루듯이 우리 인생들도 다양한 과정을 통하여 다루신다는 고귀한 진리를 알게 된다.

포도나무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물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땅속에 녹아 있는 물과 다양한 영양분을 흡수하여 포도나무를 살린다. 그리고 가지에 붙어있는 캐너피(canopy)들은 태양과 대기를 향하여 팔을 뻗어 자연 속에 녹아 있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차곡차곡 응축해 낸다. 그것이 포도열매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라고 비유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자 이제, 예수님의 마음을 알겠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의 과정을 속에서 자신을 굳게 지켜 이 자리에 서있는 오래 된 포도나무를 바라보면서 무엇인가 겸손히 배우는 인생이 되라고 비유로서 말씀하고 하는 것이다. 시편 90:12을 보라.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1초만 기다려라.“

이런 우화 같은 유머가 있다. 어떤 욕심 많은 사람이 간신히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되었다. 인자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만나니 또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세상에서 100억 불은 천국에서는 얼마 쯤 될까요?”“한 1불쯤 되지.”

“그러면 하나님, 이 세상에서 1000년은 천국에선 얼마나 되나요?” “한 1초 쯤 되지.” “그러면 하나님 제게 1불만 주세요.“ ”그러면 1초만 기다려라“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이 사람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과정의 소중함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교훈이다.

"포도나무의 성장과정”

좋은 포도나무는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의 요소가 필요하다. 우선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동안에, 아래의 땅으로부터는 물과 영양분을, 위의 하늘로 부터는 햇빛과 비, 바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그 다음에는 척박한 자연 환경을 딛고 일어서는 끈질긴 노력과 지치지 않고 전진하는 희망(希望)의 태도가 필수과정으로 요구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삶의 전 과정을 통한 열정과 수고와 헌신이 서로 조화(調和)되어 하나가 되고, 자신과 하늘과 땅이 서로 신비롭게 연합(聯合)되어질 때, 결실(結實)의 풍요로움은 기쁨과 감격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으나(이사야 53:2) 구원의 참 포도나무(요한복은 15:1)로 오신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되는 축복의 과정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자마다 예수님처럼 희망과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