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는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있음으로 아람 군대가 감히 이스라엘을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나라를 지키십니다. 방지일 목사님도 그렇게 지금껏 나라를 지켜오신 하나님의 사람이십니다.”(김삼환 목사)
한국 개신교 124년 역사 중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한국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은 대(大) 원로 방지일 목사가 백수(白壽)를 맞았다.
방지일 목사 기념사업회(이사장 김삼환 목사)는 9일 인천시 부평구에 소재한 한국선교역사기념관에서 ‘법인인가 감사예배 및 기념전시회’가 개최했다. 참석한 인사들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교회 역사에 기여해온 방 목사에 경의를 표하고, 기념관에 전시된 생생한 선교 자료들을 둘러봤다.
감사예배에서 설교를 전한 김삼환 목사(명성교회)는 1970년대 초 방지일 목사의 사택에서 성경공부를 함께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 당시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배웠던 말씀들이, 지금도 잘 박힌 못처럼 살아서 연약한 저를 지켜주고 있다”고 했다.
김삼환 목사는 “방 목사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이 복음이었다. 오늘날 주의 종들이 그분의 삶과 인격과 말씀들을 다 배워야 한다”며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아브라함의 무덤을 귀히 여기듯, 한국교회도 선조들의 영적 유산을 잘 지키면 소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예배는 사실 주인공인 방지일 목사도 모르게 비밀리에(?) 준비됐다. 방지일 목사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자신의 성역(聖役)을 소개한 전시회를 반기지 않았기 때문. 하루 전에야 이메일로 초청을 받았다는 방지일 목사는 “살아있는 사람의 전시회를 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뼈 있는 농담을 던지며 인사를 전했다. 참석자들 모두가 방 목사의 오랜 성역에 놀라움과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방 목사 본인은 “여러분들이 오늘 하는 일들을 보니 어색하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모습이었다.
이날 예배에는 이밖에도 김명혁 목사, 김승욱 목사, 김상곤 교수, 장희열 목사, 임정석 목사, 림인식 목사 등 방지일목사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참석해 축하를 전했다.
방지일 목사는
1911년 5월 21일 평북 선천에서 출생한 방지일 목사는, 1933년 평양숭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 평양대부흥(1907)의 진원지였던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일한다. 1937년 평양장로회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같은 해 4월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돼 21년간 봉직했다. 1957년 중국 공산당의 추방으로 귀국한 뒤 이듬해 영등포교회에 부임해 1979년 원로목사로 추대될 때까지 시무했다.
중국 주재 외국인 선교사로서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로 로버트 모리슨, 허드슨 테일러 등을 꼽지만, 한국인 선교사로는 단연 방지일 선교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912년 9월 장로교 총회가 창립하면서 만장일치로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했다. 선교를 받은 지 28년밖에 안 된 나라가 타문화권을 향한 선교를 시작한다는 것은 곽안련의 표현대로 세계적이고 경이로운 사실이다.
1913년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3명의 목사가 최초로 산동에 파견되었고, 2차로 방지일 목사의 선친인 방효원 목사와 고모부인 홍승한 목사가 파송되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던 중 박상순 선교사가 증파되었고, 이대영, 김순로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1919년에는 중국산동대회(산동노회와 요동노회)에 요청하여 래양 전 지역을 선교구역으로 확장할 만큼 급성장했다. 1937년에 방지일 목사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중국 선교사로 파송됐다. 방 목사는 “중국 사람이 되고 돌아오지 말아 말씀만 전하라”는 당부를 가슴에 품고 중국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선교했다. 그는 중가와, 소췐장, 태평진, 오가촌교회 등을 세우며 중국인이 되어 살았다.
방지일 목사는 5번의 정변을 겪어냈지만 결국 공산화로 외국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하고 최후로 방지일 목사까지 1957년 홍콩으로 추방됐다. 이렇게 하여 44년간의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해외선교 사역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깊이 전파된 복음은 단단한 뿌리를 내렸고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 값진 열매를 맺고 있다.
한국 개신교 124년 역사 중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한국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은 대(大) 원로 방지일 목사가 백수(白壽)를 맞았다.
방지일 목사 기념사업회(이사장 김삼환 목사)는 9일 인천시 부평구에 소재한 한국선교역사기념관에서 ‘법인인가 감사예배 및 기념전시회’가 개최했다. 참석한 인사들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교회 역사에 기여해온 방 목사에 경의를 표하고, 기념관에 전시된 생생한 선교 자료들을 둘러봤다.
감사예배에서 설교를 전한 김삼환 목사(명성교회)는 1970년대 초 방지일 목사의 사택에서 성경공부를 함께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 당시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배웠던 말씀들이, 지금도 잘 박힌 못처럼 살아서 연약한 저를 지켜주고 있다”고 했다.
▲방지일 목사가 1958년부터 시작했던 ‘목회자 월요성경읽기모임’ | |
김삼환 목사는 “방 목사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이 복음이었다. 오늘날 주의 종들이 그분의 삶과 인격과 말씀들을 다 배워야 한다”며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아브라함의 무덤을 귀히 여기듯, 한국교회도 선조들의 영적 유산을 잘 지키면 소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예배는 사실 주인공인 방지일 목사도 모르게 비밀리에(?) 준비됐다. 방지일 목사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자신의 성역(聖役)을 소개한 전시회를 반기지 않았기 때문. 하루 전에야 이메일로 초청을 받았다는 방지일 목사는 “살아있는 사람의 전시회를 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뼈 있는 농담을 던지며 인사를 전했다. 참석자들 모두가 방 목사의 오랜 성역에 놀라움과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방 목사 본인은 “여러분들이 오늘 하는 일들을 보니 어색하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모습이었다.
이날 예배에는 이밖에도 김명혁 목사, 김승욱 목사, 김상곤 교수, 장희열 목사, 임정석 목사, 림인식 목사 등 방지일목사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참석해 축하를 전했다.
방지일 목사는
▲방지일 목사가 제1회국민선교대상을 수상하던 당시 모습. ⓒ방지일 목사 기념사업회 | |
1911년 5월 21일 평북 선천에서 출생한 방지일 목사는, 1933년 평양숭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 평양대부흥(1907)의 진원지였던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일한다. 1937년 평양장로회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같은 해 4월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돼 21년간 봉직했다. 1957년 중국 공산당의 추방으로 귀국한 뒤 이듬해 영등포교회에 부임해 1979년 원로목사로 추대될 때까지 시무했다.
중국 주재 외국인 선교사로서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로 로버트 모리슨, 허드슨 테일러 등을 꼽지만, 한국인 선교사로는 단연 방지일 선교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912년 9월 장로교 총회가 창립하면서 만장일치로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했다. 선교를 받은 지 28년밖에 안 된 나라가 타문화권을 향한 선교를 시작한다는 것은 곽안련의 표현대로 세계적이고 경이로운 사실이다.
1913년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3명의 목사가 최초로 산동에 파견되었고, 2차로 방지일 목사의 선친인 방효원 목사와 고모부인 홍승한 목사가 파송되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던 중 박상순 선교사가 증파되었고, 이대영, 김순로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1919년에는 중국산동대회(산동노회와 요동노회)에 요청하여 래양 전 지역을 선교구역으로 확장할 만큼 급성장했다. 1937년에 방지일 목사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중국 선교사로 파송됐다. 방 목사는 “중국 사람이 되고 돌아오지 말아 말씀만 전하라”는 당부를 가슴에 품고 중국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선교했다. 그는 중가와, 소췐장, 태평진, 오가촌교회 등을 세우며 중국인이 되어 살았다.
방지일 목사는 5번의 정변을 겪어냈지만 결국 공산화로 외국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하고 최후로 방지일 목사까지 1957년 홍콩으로 추방됐다. 이렇게 하여 44년간의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해외선교 사역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깊이 전파된 복음은 단단한 뿌리를 내렸고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 값진 열매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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