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성 목회자로 동북부 지방회 첫 번째 회장을 맡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총회 한국 총회에서도 처음 여성 목회자이신가요?
2년 전 LA 지역 서남부 지방회에서 처음 여성 목회자가 지방회장으로 선임됐으니 한국 총회에서는 두 번째이고 동북부 지방회에서는 처음입니다.
2. 뉴욕 일원의 지방회장(노회장)으로도 여성으로 처음 선임되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저희 형제가 딸 여섯에 아들 셋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늘 딸들에게 여자도 대통령도 할 수 있고, 국회의원, 장관 다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키웠습니다. 또 저희 남편도 여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뒷바라지를 잘 해 주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선입관이나 편견을 버리고 기존의 전통이나 관습을 버리고 보면, 여성 리더가 장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하고, 기도하고, 희생하는 것이 여성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겸손하고 순수하며 진실한 여성들의 성품이 목회하는데도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3.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목회자가 되셨는지요?
대학교 4학년 때 남편과 결혼하고 미국에는 1976년 3월에 유학생 가족으로 왔습니다. 그 해 10월에 이동원 목사님께 성경 공부를 받은 성도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고, 그때 마침 최자실 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갔다 성령 체험을 하고 방언을 받게 됐습니다. 두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됐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계신 상태여서,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2년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최자실 목사님께서 한 장로님을 소개시켜 주셔서 그 장로님을 통해 아버지를 전도해보려고 했습니다. 서울에 계신 장로님이 부산 양산에 계신 저희 아버지에게 두 번이나 찾아가 복음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 마음을 열지 못하셔서 미국서 제가 한국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에 들어가 일주일간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며 가족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뜨겁게 기도를 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일주일간 기도하고 나서 그 이튿날 새벽, 집안에 있던 악한 영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다음날이 되니 아버지께서 오산리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2명과 함께 오산리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3일 만에 아버지께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10년을 앓고 있어 굉장히 심한 상태였는데 중풍이 그 때 나으셨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와서 기도를 하며 소명을 받았는데 그 때는 그게 소명인지 확실하게 알 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3년 후에 이천석 목사님께서 방언 통변을 해 주셔서 확실히 알고 결단을 하게 됐습니다. ‘전도자가 되라. 복음을 전해다오’라고 통변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미시간에 있을 때부터 친척들을 보러 방학 때마다 뉴욕에 왔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친척들을 만나는 여행의 목적으로 왔는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친척들을 전도하기 위한 여행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다녀온 후 제 안에서 '뉴욕을 제게 주시옵소서'하는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뉴욕의 한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뜨거웠고 뉴욕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1979년 뉴욕으로 왔고 최자실 목사님 이하 여러 목사님들께서 추천을 해 주셔서 이반젤뉴욕신학대학(원) 전신인 순복음뉴욕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1979년에 입학해 1980년에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 본교 신학교 VALLEY FORGE CHRISTIAN COLLEGE에서 1년을 수학했습니다.
그 때 순복음뉴욕신학대학에서 고린도전서를 강의하러 온 한진관 목사님을 뵙고 퀸즈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1979년 초부터 1989년 초까지 10년간 전도사로 시무했습니다. 뉴욕의 한인들에 대한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는데, 그래서 퀸즈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할 때는 밤까지 전도하러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1991년 초부터는 남부 뉴저지에서 베데스다선교교회를 개척해 1998년까지 목회했습니다. 2003년부터는 뉴욕에서 영성 센터를 운영하며 영성운동과 은사 계발 사역을 하며 러브미션교회 사역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2년 전 LA 지역 서남부 지방회에서 처음 여성 목회자가 지방회장으로 선임됐으니 한국 총회에서는 두 번째이고 동북부 지방회에서는 처음입니다.
2. 뉴욕 일원의 지방회장(노회장)으로도 여성으로 처음 선임되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저희 형제가 딸 여섯에 아들 셋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늘 딸들에게 여자도 대통령도 할 수 있고, 국회의원, 장관 다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키웠습니다. 또 저희 남편도 여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뒷바라지를 잘 해 주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선입관이나 편견을 버리고 기존의 전통이나 관습을 버리고 보면, 여성 리더가 장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하고, 기도하고, 희생하는 것이 여성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겸손하고 순수하며 진실한 여성들의 성품이 목회하는데도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3.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목회자가 되셨는지요?
대학교 4학년 때 남편과 결혼하고 미국에는 1976년 3월에 유학생 가족으로 왔습니다. 그 해 10월에 이동원 목사님께 성경 공부를 받은 성도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고, 그때 마침 최자실 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갔다 성령 체험을 하고 방언을 받게 됐습니다. 두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됐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계신 상태여서,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2년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최자실 목사님께서 한 장로님을 소개시켜 주셔서 그 장로님을 통해 아버지를 전도해보려고 했습니다. 서울에 계신 장로님이 부산 양산에 계신 저희 아버지에게 두 번이나 찾아가 복음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 마음을 열지 못하셔서 미국서 제가 한국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에 들어가 일주일간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며 가족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뜨겁게 기도를 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일주일간 기도하고 나서 그 이튿날 새벽, 집안에 있던 악한 영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다음날이 되니 아버지께서 오산리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2명과 함께 오산리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3일 만에 아버지께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10년을 앓고 있어 굉장히 심한 상태였는데 중풍이 그 때 나으셨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와서 기도를 하며 소명을 받았는데 그 때는 그게 소명인지 확실하게 알 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3년 후에 이천석 목사님께서 방언 통변을 해 주셔서 확실히 알고 결단을 하게 됐습니다. ‘전도자가 되라. 복음을 전해다오’라고 통변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미시간에 있을 때부터 친척들을 보러 방학 때마다 뉴욕에 왔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친척들을 만나는 여행의 목적으로 왔는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친척들을 전도하기 위한 여행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다녀온 후 제 안에서 '뉴욕을 제게 주시옵소서'하는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뉴욕의 한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뜨거웠고 뉴욕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1979년 뉴욕으로 왔고 최자실 목사님 이하 여러 목사님들께서 추천을 해 주셔서 이반젤뉴욕신학대학(원) 전신인 순복음뉴욕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1979년에 입학해 1980년에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 본교 신학교 VALLEY FORGE CHRISTIAN COLLEGE에서 1년을 수학했습니다.
그 때 순복음뉴욕신학대학에서 고린도전서를 강의하러 온 한진관 목사님을 뵙고 퀸즈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1979년 초부터 1989년 초까지 10년간 전도사로 시무했습니다. 뉴욕의 한인들에 대한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는데, 그래서 퀸즈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할 때는 밤까지 전도하러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1991년 초부터는 남부 뉴저지에서 베데스다선교교회를 개척해 1998년까지 목회했습니다. 2003년부터는 뉴욕에서 영성 센터를 운영하며 영성운동과 은사 계발 사역을 하며 러브미션교회 사역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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