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한 사건이 뉴욕의 한국 신문 주요 일간지의 사회면을 장식했다. 성추행으로 오해하게 된 것은 문화적인 차이 때문이라며 이민자들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나의 억울함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없었다. 변호사를 만났는데 재판 일정이 잡혔다고 했다. 미국 법정의 재판 과정으로는 대 배심원 재판 일정이 잡혔다고 했다. 미국 법정의 재판 과정으로는 대 배심원 제도와 소 배심원 제도가 있는데 대 배심원 제도를 택해서 재판을 하게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즉 24명의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심사를 해서 결정을 내리는 제도다.

재판 당일 나는 양복에 넥타이를 메고 변호사와 함께 재판정에 들어섰다. 통역을 할 한국 분이 기다리고 있었고, 24명의 배심원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판사가 먼저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게 했다. 첫 질문은 미국에 오게 된 동기와 배경을 설명하라는 것이었고, 나는 사실대로 자세히 설명했다. 다음 질문은 남자 아이 둘을 2월 달에 몇 차례, 3월 달에 몇 차례 권총으로 위협하고 성기를 만진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서 강력하게 부인하고 결코 그런 행동을 한 일이 없다고 답변했다. 몇 가지 다른 질문이 있었고, 답변을 한 후에 1차 재판이 끝났다. 한 달여 후에 2차 재판이 있었다. 또다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게 했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답변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더군다나 남자 아이들을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하고 추행한다는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더욱이 나는 2월 달에 맨하튼 봉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다."

다행히 중간 중간 통역을 하다 보니 다음 말을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나는 법정에 들어오기 전 하나님께 법정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해주시고 배심원들의 마음도 주장해 주셔서 무죄 판결을 받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다. 판사가 잠시 나가 있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와 변호사가 밖으로 나왔다.

잠시 나와 있는 동안 나는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미국이란 나라는 세계 만국에 그렇게도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라고 부르짖으면서 미국 내에서는 처참히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고소인의 진술만을 듣고 한 마디 말도 없이, 확인 절차도 없이 무조건 사람을 잡아 가두고 형무소까지 보낸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나 법치국가에서 도무지 할 짓이 아닌 것이다. 이 일은 결코 나 하나만의 일이 아니라 많은 소수민족이 겪는 이민자들의 아픔이요 서러움이었다. 나를 고소한 사람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면 질의도 없이 무슨 놈의 재판이 이렇단 말인가. 6.25 전쟁 때 어려운 우리 한국을 도와준 우방국이라는,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미국 사람 믿지 말라던 우스갯소리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얼마 후 판사가 다시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추가로 몇 가지 질문을 했고, 그에 대하여 내가 또박또박 답변을 함으로써 재판이 끝났다. 변호사는 나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나는 마음이 착잡하고 초조해졌다. '주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 변호사가 나오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올려 보였다. 우리가 이겼다는 것이었다. 그는 축하한다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종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기쁜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두 주간이 지난 후에(일부 경비를 제하고) 보석금으로 냈던 돈과 지문 찍은 것과 모든 서류가 소포로 송달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