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미도 날이지마는
낫같이 잘 들 리도 없습니다.
아버지도 어버이시지마는,
어머님같이 사랑하실 이가 없습니다.
아시오(말씀 마시오) 임이시여
어머님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습니다. 」

고려조에 작자 미상의 사모곡(思母曲)한편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가요가 신라때부터 있었던 노래라고도 한다. 이 노래는 비록 진솔하고 소박한 표현을 사용을 하였지만 직유법, 비교법, 영탄법 등을 사용한 고도 기법 시이다, 농경 사회의 친숙한 농기구에 빗대어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을 노래한 작자의 감추어진 속내에서 언 듯 무심한 아버지를 원망하는 듯 하다.

내 어머니는 황해도 사리원분이다. 사리원 보통학교와 황해도의 명문 해주 행정여고보를 나오셨으니 당시로는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다. 21세 꽃다운 나이에 평북 철산 총각에 시집와서 향년 86세이시니 부모슬하를 떠나 사신지 65년 세월이 지났다. 유기공장을 크게 하셨던 외조부의 2남 2녀 중 장녀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어머니는 재령평야의 기름진 곡물과 몽금포의 싱싱한 생선, 황주의 당도 높은 사과 그리고 추운 겨울 밤에 자전거 배달부가 가져오는 꿩 육수 얼음 냉면을 온 식구들이 둘러 앉아 먹던 아련한 추억에 젖어 있을 틈 없이 4남 2녀를 낳으시고 기르시느라고 전 생애를 소진하셨다.

장남인 나를 가지시고 홀로 3.8선을 넘으실 때 사선을 수없이 넘으셨고, 서울 북아현동 신혼집에는 이북에서 피난온 시 일가 친척으로 날마다 북새통을 이루었으니 그 수고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인민군에 체포되어 끌려가는 남편을 아무도 막아 주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는 연약한 몸으로 그 총부리를 밀어내고 구원해 내시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평생 무덤덤하시고 어머니는 일향 남편을 연모하시고 사셨다.

어머니보다 소년 과수가 되신 형수님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셨던 아버지를 원망하고 질투하실만 하건만 언제나 묵묵히 지켜만 보셨다. 내 평생에 아버지와 나란히 걸어가시는 어머니를 뵌 적이 없다. 반평생 위염으로 고생하시고 대 수술을 몇 차례나 받으신 아버지옆에서 밤을 새우시면서 등을 쓸어 주시던 어머니는 천생 아버지의 그림자이셨다. 아마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 보시지 못했을 어머니. 옛 시인의 사모곡 중에 “ 호미도 날이지마는 낫같이 잘 들 리도 없습니다.”라는 구절이 내게 크게 감동되는 것은 바로 이 까닭이다. 사리원 옛집도 그리우실테고 부모님 동생들 친구들 모두 그리우실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지 못하는 자식의 불효를 이 작은 글로 땜질 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