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워싱턴 DC에서 일하시며 선교도 열심히 하시고, 예수님을 잘 믿는 한 분의 장로님께서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산호세에 예수 잘 믿는 집사님의 아들이 총기사고로 절명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늘 겸손함으로 교회를 섬기며 기도에 힘쓰시는 저희 장모님도 지금 폐암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금주 최장로님께서 이런 기도부탁을 해 주셨습니다. “목사님, 김장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아마도 출판한 서적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주 부활절 날에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온 서집사님 가정에게 조금이라도 무엇을 해 주고 싶어서 두릅나무를 따다가 저는 손과 발을 크게 다쳤습니다.

가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젊은 나이에 죽게 하는가? 왜 믿음의 가정인데 어려움을 겪을까? 예수를 잘 믿으면 아무 어려움도, 문제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의심이 생기고 또한 믿음이 흔들리는 분들을 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에게도 사고는 일어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어려움이 없다, 죽음이 없다 이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반드시 언젠가는 죽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합니다. 어디까지 잘 되어야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얼마까지 살아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간증할까? 60세? 70세? 80세? 얼마나 잘 되어야 하나님을 늘 인정하고 살까? 얼마나 잘 되어야 불평하지 않고 늘 감사하면서 살까? 얼마나 잘 되어야지 정말 섬김으로 갈수 있고 영혼구원에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2000년 전 30대 청년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열두 제자중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했던 제자 요한은 자연사를 했지만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바울은 목 베임을 당해 죽었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모두가 다 순교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기독교인은 교통사고로 죽어서는 안 되고, 총에 맞아 죽어도 안 되고, 병으로 죽어도 안 되고, 한 명도 빠짐없이 100살 가까이 되어 자연사를 해야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가 될까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간에 죽는 방법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방식의 차이입니다. 주님이 천국을 약속하시고, 영생을 약속하셨지만 편안함을 약속한 것은 아닙니다. 감당할 시험을 약속하셨지만 시험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실력과 우리의 수준도 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상황 속에서 천국의 시각으로 모든 삶을 바라볼 때 이 땅의 시각은 달라집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참고 견디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운 부활의 승리가 있습니다. 얼마나 주님 앞에 자신의 문제를 내어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살아계신 주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보여주시는 비전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금주 한 분의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힘들어도 감사하면서 삽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