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세대교체, 교회연합, 2세 사역, 부흥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들고 시카고 지역 목회자 40인을 만난다. 이 인터뷰를 통해 시카고 한인교회의 여론을 수렴하고 한인교회의 미래와 나아갈 바를 조명하고자 함이다. 40인 인터뷰는 시카고 교계의 발전을 위한, 가능한 모든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시무하는 교회의 교세, 목회자의 교단적 배경, 목회 연수 등에 관계없는 순으로 게재된다.
스물다섯번째 인터뷰는 맥코믹신학교 이재원 교수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기독교학과 대학원으로 진학해 석사를 마쳤다. 이후 라인홀드 니버, 폴 틸리히, 본 회퍼 등이 거쳐간 유니온신학교로 유학해 한 학기동안 STM 과정을 이수한 후, 박사과정에 입학해 성서신학 전공으로 Ph.D. 학위를 취득했다. 뉴욕에서 유학하는 동안 브롱스한인교회에서 유스 부서를 맡아 목회했고 맥코믹신학교에 교수로 온지는 7년이 됐다.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당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나의 신학함이 사회적인 연장선상에서 어떻게 실존성을 갖는가”를 놓고 고뇌했다. 당시 안병무 선생을 통해 민중신학을 접하고 그가 소장으로 있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일하게 됐다. 이 교수는 주로 번역 업무를 했지만 연구소 안에서 신학적 토론과 공부에도 참여했다. 한신대 강원돈 교수, 박재순 박사 등이 그 당시 동료들이다.
-진보신학은 보수신학계로부터 극심한 비판에 부딪히곤 합니다. ‘고난받는 민중이 메시야’라는 민중신학 역시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신학적인 논구에 있어서 논리적 모순과 헛점이 많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몰트만 박사의 지적처럼 예수님 당시의 민중들은 예수를 따르던 사회적 약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예수를 못박으라 외친 대중이기도 합니다. 민중이 그리스도라면 기독교의 근본 교리인 그리스도론 역시 다시 논의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 민중을 구원할 자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란 질문도 생겨 나는데요.
민중신학의 핵심을 말하자면 민중과 함께 한 예수, 아래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것을 상징적으로, 수사학적으로 말할 때 “예수는 민중이다. 민중은 예수다”라고 표현하는 것인데 민중신학을 평가할 때에 문자 그대로의 논쟁은 이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민중신학의 시대적 필요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사회 안에는 사회적 약자가 존재합니다. 성서가 이런 약자의 권리를 되찾아 주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적 지배 구조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조명하고 그 일을 어떻게 우리도 할 것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시였으니 우린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 우리가 더 이상 고민할 필요조차 사라져 버립니다. 그 당시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우리는 어떤 연관성 속에서 현대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진보신학은 지나치게 정치 이데올로기화 돼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이미 한국은 민주화된 사회를 지나면서 진보신학이 더 이상 싸울 존재를 잃어 버렸다는 지적도 받고 있습니다.
정치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정치를 강자와 약자, 이원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현 시대 경제파탄의 문제, 세계 에너지 문제, 공해 문제 등 삶의 모든 분야를 다루는 것입니다. 싸울 존재를 잃어 버렸다는 말은 제대로 운동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말일 뿐입니다. 민중이라는 개념 역시 80년대에 말하던 여성 문제, 경제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젠 사회적 억압과 관련된 환경 공해 문제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민중이란 말이 던지는 과제가 오히려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런 교회의 사회 참여가 개인의 영혼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냐는 지적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영혼 구원 문제 역시 정치적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느냐가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혼 구원을 말하려면 종교적 세계관이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적 세계관은 예수를 믿는 신앙을 인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죽고 나서 가는 천국을 기대하면서 세상의 불의에 눈감는 그런 종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현실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현실 속에서 신앙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죽어서 갈 천국만 기대하는 것이 영혼구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 교수님이 말씀하신 진보신학의 필요성과 가치에 근거해 사회적 약자로 볼 수도 있는 이민자들의 이민신학도 도출할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이민교회의 신학은 보통 ‘위로의 신학’이라고 정리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민신학이 학문적으로 정립된 것은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이민신학이 위로의 신학이란 점은 일면 타당성이 있습니다. 다만 어떤 위로가 필요한지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면에서 위로가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인 이민사회를 볼 때 물론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도 많고 경제력이 상당한 분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소수 민족 커뮤니티입니다. 우리가 미국사회 속에서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누리고 있습니까? 단순히 내 자녀 교육을 잘 시키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한인 이민사회의 위상을 높이는 일일까요?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해야 하는 이민사회 동포들은 교회에서 위로도 받고 싶고 위안도 얻고 싶어 합니다. 또 사실 그런 이유로 교회를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녀 교육 문제로 고민하다 교회에 와서 위로받고, 경제적 어려움에 고생하다 교회에 와서 희망을 얻습니다.
기독교를 개인의 구원 영역으로만 한정시키는 현상이 이민사회 속에서는 더욱 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종교적이면서 정치적이고, 영적이면서 실존적인 한 인간의 존재를 더욱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이민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위로받는 것에 만족해야 하나요? 현대의 개인을 지배하는 거대한 자본과 금융논리 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똑바로 보고 다시 한번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대안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새로운 비전을 품을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미래는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안적 미래를 꿈꾸는 기독교로 새롭게 거듭날 때 영혼 구원을 향한 새로운 희망의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이민자들이 자녀 잘 키우고 돈 많이 벌고 위로받는 것에만 그쳐야 합니까? 이민자들은 이민사회 소수 민족으로서 어떤 희망을 꿈꾸고 추구해야 하는지 탐구하는 신학이 나와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민신학이 진정으로 정립되려면 신학자와 이민교회 지도자들, 성도가 어우러져 공감대를 형성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제 의견에 이민신학은 한국과 미국과의 정치 경제적 관계에서부터 흑인신학과 같은 약자들의 신학, 각종 다민족 신학, 한국신학을 포괄하며 연구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시카고신학교 서보명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한국기독교연구소(The Center for the Study of Korean Christianity)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도 이 연구소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미국 신학계에서는 이미 과거부터 소수민족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흑인신학이나 타커뮤니티 신학과의 연대 속에서 한인 이민신학을 찾아가야 합니다. 특히 아시안 이민교회들과 연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민신학의 목표는 한인사회가 어떻게 미국사회 속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며 성숙한 사회로 약진할 수 있을까입니다. 현대는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어 갈 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이 희망의 신학은 여성신학에서도, 흑인신학에서도, 다인종신학에서도, 제3세계 신학에서도 나와야 합니다. 미래는 현재로부터 이어지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우린 희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루려 했던 이상이 무엇인지 다시 보면서 우리 기독교회는 21세기에 어떤 희망을 불러 일으킬 것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민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전 믿습니다.
-이민신학의 정립은 한인 1세뿐 아니라 2세와의 연대 속에서도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2세들에게 희망을 걸 수 있을까요? 한인교회의 2세 교육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희망을 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세와 2세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2세들에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교육시키고 이민자로서 미국사회에서 제대로 커 나가게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만 힘겹게 좋은 대학에 보내서 뒷바라지 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면 안됩니다. 미국 사회 속에서 자녀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살 것인지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심어주고 그들이 감당할 과제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낭만적 민족주의나 국수주의가 아닙니다. 2세들의 교육의 책임은 1세에게 있습니다. 우린 1세와 2세 간에 존재하는 단절을 너무 일찍 인정하려고 합니다. 집에서는 자녀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고 미국화 되길 요구하면서 교회에서는 한국말을 쓰라고 하고 1세의 권위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2세들은 적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2세들에게 미국사회 속의 한인을 어떻게 봐야 할지 가르쳐 주고 2세들이 지향해야 할 희망이 무엇인지 찾게 해야 합니다. 진지한 고민을 지금 하지 않으면 현재 1세들의 문제들이 그대로 2세에 남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씨름을 하지 않으면 해답이 없습니다. 이제 교회 안의 연구나 토론도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어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맥코믹신학교에 교수님께 배우고 있는 한인 유학생 제자들에게도 이런 도전을 많이 던지십니까?
현재 한 20여 명의 한인이 이곳에서 공부 중입니다. 저는 그동안 맥코믹신학교를 거쳐간 제자들에게 “우리가 이민사회 속에서 조금이라도 이런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동력이 되자”고 도전해 왔습니다. 자꾸 그런 의식을 공유할 때, 지금은 변화의 속도가 느리지만 10-20년 뒤에는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후진들에게 현재와는 다른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지금의 문제는 총체적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진단하고 분석하는 것도 총체적이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는 성장주의에만 빠져 있고 리더십 세미나를 하더라도 세상의 리더십 이론을 그대로 가져다가 씁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예언자적인 시각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외침을 재해석하고 기독교 신앙이 줄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글로컬(Global+ Local)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되 현실에서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실천해 가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영성, 영성”하는데 영성은 아래로부터 사회의 문제를 끌어 안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도 그래서 이 땅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영성은 이 땅으로 내려 오는 것이지 하늘로 올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한번뿐인데 이것을 어떤 삶으로 만들어 놓고 갈 것인가 생각해 봅시다. 나의 신앙의 삶이 타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지 고민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한인교회와 이민사회 안에 닥쳐 온 도전 앞에 용기를 가집시다.
-오늘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스물다섯번째 인터뷰는 맥코믹신학교 이재원 교수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기독교학과 대학원으로 진학해 석사를 마쳤다. 이후 라인홀드 니버, 폴 틸리히, 본 회퍼 등이 거쳐간 유니온신학교로 유학해 한 학기동안 STM 과정을 이수한 후, 박사과정에 입학해 성서신학 전공으로 Ph.D. 학위를 취득했다. 뉴욕에서 유학하는 동안 브롱스한인교회에서 유스 부서를 맡아 목회했고 맥코믹신학교에 교수로 온지는 7년이 됐다.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당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나의 신학함이 사회적인 연장선상에서 어떻게 실존성을 갖는가”를 놓고 고뇌했다. 당시 안병무 선생을 통해 민중신학을 접하고 그가 소장으로 있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일하게 됐다. 이 교수는 주로 번역 업무를 했지만 연구소 안에서 신학적 토론과 공부에도 참여했다. 한신대 강원돈 교수, 박재순 박사 등이 그 당시 동료들이다.
-진보신학은 보수신학계로부터 극심한 비판에 부딪히곤 합니다. ‘고난받는 민중이 메시야’라는 민중신학 역시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신학적인 논구에 있어서 논리적 모순과 헛점이 많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몰트만 박사의 지적처럼 예수님 당시의 민중들은 예수를 따르던 사회적 약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예수를 못박으라 외친 대중이기도 합니다. 민중이 그리스도라면 기독교의 근본 교리인 그리스도론 역시 다시 논의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 민중을 구원할 자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란 질문도 생겨 나는데요.
민중신학의 핵심을 말하자면 민중과 함께 한 예수, 아래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것을 상징적으로, 수사학적으로 말할 때 “예수는 민중이다. 민중은 예수다”라고 표현하는 것인데 민중신학을 평가할 때에 문자 그대로의 논쟁은 이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민중신학의 시대적 필요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사회 안에는 사회적 약자가 존재합니다. 성서가 이런 약자의 권리를 되찾아 주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적 지배 구조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조명하고 그 일을 어떻게 우리도 할 것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시였으니 우린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 우리가 더 이상 고민할 필요조차 사라져 버립니다. 그 당시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우리는 어떤 연관성 속에서 현대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진보신학은 지나치게 정치 이데올로기화 돼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이미 한국은 민주화된 사회를 지나면서 진보신학이 더 이상 싸울 존재를 잃어 버렸다는 지적도 받고 있습니다.
정치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정치를 강자와 약자, 이원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현 시대 경제파탄의 문제, 세계 에너지 문제, 공해 문제 등 삶의 모든 분야를 다루는 것입니다. 싸울 존재를 잃어 버렸다는 말은 제대로 운동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말일 뿐입니다. 민중이라는 개념 역시 80년대에 말하던 여성 문제, 경제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젠 사회적 억압과 관련된 환경 공해 문제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민중이란 말이 던지는 과제가 오히려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런 교회의 사회 참여가 개인의 영혼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냐는 지적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영혼 구원 문제 역시 정치적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느냐가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혼 구원을 말하려면 종교적 세계관이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적 세계관은 예수를 믿는 신앙을 인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죽고 나서 가는 천국을 기대하면서 세상의 불의에 눈감는 그런 종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현실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현실 속에서 신앙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죽어서 갈 천국만 기대하는 것이 영혼구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 교수님이 말씀하신 진보신학의 필요성과 가치에 근거해 사회적 약자로 볼 수도 있는 이민자들의 이민신학도 도출할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이민교회의 신학은 보통 ‘위로의 신학’이라고 정리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민신학이 학문적으로 정립된 것은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이민신학이 위로의 신학이란 점은 일면 타당성이 있습니다. 다만 어떤 위로가 필요한지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면에서 위로가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인 이민사회를 볼 때 물론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도 많고 경제력이 상당한 분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소수 민족 커뮤니티입니다. 우리가 미국사회 속에서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누리고 있습니까? 단순히 내 자녀 교육을 잘 시키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한인 이민사회의 위상을 높이는 일일까요?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해야 하는 이민사회 동포들은 교회에서 위로도 받고 싶고 위안도 얻고 싶어 합니다. 또 사실 그런 이유로 교회를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녀 교육 문제로 고민하다 교회에 와서 위로받고, 경제적 어려움에 고생하다 교회에 와서 희망을 얻습니다.
기독교를 개인의 구원 영역으로만 한정시키는 현상이 이민사회 속에서는 더욱 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종교적이면서 정치적이고, 영적이면서 실존적인 한 인간의 존재를 더욱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이민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위로받는 것에 만족해야 하나요? 현대의 개인을 지배하는 거대한 자본과 금융논리 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똑바로 보고 다시 한번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대안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새로운 비전을 품을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미래는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안적 미래를 꿈꾸는 기독교로 새롭게 거듭날 때 영혼 구원을 향한 새로운 희망의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이민자들이 자녀 잘 키우고 돈 많이 벌고 위로받는 것에만 그쳐야 합니까? 이민자들은 이민사회 소수 민족으로서 어떤 희망을 꿈꾸고 추구해야 하는지 탐구하는 신학이 나와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민신학이 진정으로 정립되려면 신학자와 이민교회 지도자들, 성도가 어우러져 공감대를 형성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제 의견에 이민신학은 한국과 미국과의 정치 경제적 관계에서부터 흑인신학과 같은 약자들의 신학, 각종 다민족 신학, 한국신학을 포괄하며 연구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시카고신학교 서보명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한국기독교연구소(The Center for the Study of Korean Christianity)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도 이 연구소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미국 신학계에서는 이미 과거부터 소수민족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흑인신학이나 타커뮤니티 신학과의 연대 속에서 한인 이민신학을 찾아가야 합니다. 특히 아시안 이민교회들과 연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민신학의 목표는 한인사회가 어떻게 미국사회 속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며 성숙한 사회로 약진할 수 있을까입니다. 현대는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어 갈 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이 희망의 신학은 여성신학에서도, 흑인신학에서도, 다인종신학에서도, 제3세계 신학에서도 나와야 합니다. 미래는 현재로부터 이어지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우린 희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루려 했던 이상이 무엇인지 다시 보면서 우리 기독교회는 21세기에 어떤 희망을 불러 일으킬 것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민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전 믿습니다.
-이민신학의 정립은 한인 1세뿐 아니라 2세와의 연대 속에서도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2세들에게 희망을 걸 수 있을까요? 한인교회의 2세 교육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희망을 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세와 2세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2세들에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교육시키고 이민자로서 미국사회에서 제대로 커 나가게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만 힘겹게 좋은 대학에 보내서 뒷바라지 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면 안됩니다. 미국 사회 속에서 자녀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살 것인지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심어주고 그들이 감당할 과제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낭만적 민족주의나 국수주의가 아닙니다. 2세들의 교육의 책임은 1세에게 있습니다. 우린 1세와 2세 간에 존재하는 단절을 너무 일찍 인정하려고 합니다. 집에서는 자녀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고 미국화 되길 요구하면서 교회에서는 한국말을 쓰라고 하고 1세의 권위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2세들은 적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2세들에게 미국사회 속의 한인을 어떻게 봐야 할지 가르쳐 주고 2세들이 지향해야 할 희망이 무엇인지 찾게 해야 합니다. 진지한 고민을 지금 하지 않으면 현재 1세들의 문제들이 그대로 2세에 남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씨름을 하지 않으면 해답이 없습니다. 이제 교회 안의 연구나 토론도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어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재원 교수는 “이민교회와 신학의 변화 가운데 지금과는 다른 더 좋은 미래를 꿈꾼다”고 말했다. |
현재 한 20여 명의 한인이 이곳에서 공부 중입니다. 저는 그동안 맥코믹신학교를 거쳐간 제자들에게 “우리가 이민사회 속에서 조금이라도 이런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동력이 되자”고 도전해 왔습니다. 자꾸 그런 의식을 공유할 때, 지금은 변화의 속도가 느리지만 10-20년 뒤에는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후진들에게 현재와는 다른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지금의 문제는 총체적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진단하고 분석하는 것도 총체적이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는 성장주의에만 빠져 있고 리더십 세미나를 하더라도 세상의 리더십 이론을 그대로 가져다가 씁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예언자적인 시각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외침을 재해석하고 기독교 신앙이 줄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글로컬(Global+ Local)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되 현실에서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실천해 가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영성, 영성”하는데 영성은 아래로부터 사회의 문제를 끌어 안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도 그래서 이 땅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영성은 이 땅으로 내려 오는 것이지 하늘로 올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한번뿐인데 이것을 어떤 삶으로 만들어 놓고 갈 것인가 생각해 봅시다. 나의 신앙의 삶이 타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지 고민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한인교회와 이민사회 안에 닥쳐 온 도전 앞에 용기를 가집시다.
-오늘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