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원

30대 나이에 젊은 아내와 두 어린 아들을 두고 자연사한 박영원 그의 이름은 영원이었지만 지상에서는 매우 짧은 생을 살다가 간 친구이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서 진솔한 삶의 모범자였다. 평범한 공학도였던 그는 사당동집에서 한양대학까지 통학하고 나는 연희동집에서 사당동 총신대원으로 다니다 깔닥고개에서 만날라 치면 빙긋이 웃고 God bless you! 를 연발하던 그다. 그토록 얌전한 생원님 같았던 그가 하늘같은 선배들이라도 잘못된 주장을 펴면 끝까지 굽히지 않고 맞서 꼴통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가 LA이민 후 자리잡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소식을 접한지 얼마 안되 부모님 댁을 방문하고 귀가해 저녁 경건시간을 갖는 도중 의자에 앉은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심장마비도 아니고 그저 나이 많아 스르르 눈 감은 사람처럼 Natural Death했다는 것이다.


리춘이

거꾸로 읽어도 이춘이였던 리목사는 포병장교 출신으로 당시는 드물게 기술장교로 미국 유학까지 한 엘리트였다. 군 복무 중 예수를 영접한 그는 출세가 보장된 군 생활을 접고 늦게 신학을 하여 평생 예수를 위하여 살다간 훌륭한 무인이였다. 두 번의 개척을 하면서 사경회때 마다 초대하여 말씀 증거의 기회를 준 그는 오직 예수 전도에 목회 철학을 정하고 방문, 노방, 문서전도 등 돈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전도란 전도는 다 한 열정의 전도인이었다. 결국 50대 나이에 마다가스카르에 변변한 선교후원자도 없이 사모와 함께 가서 1년 6개월 복음전도에 불꽃을 사르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오지 선교사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호방한 웃음과 영혼에 대한 눈물을 볼 수 없게 된지도 십여년이 흘렀다.


노광호

그의 일생은 대우맨 인 동시에 조이어로 살다가 간 생애라 할 수 있다. 그는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성공적인 직장인의 삶을 살 수 있는가의 모범된 인물이었다. 마치 고넬료를 연상시키는 정직 성실 진중 열심 이런 표현들로 만은 부족한 전천후 그리스도인이요 한 교회의 모범된 장로였다. 저와 함께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 한 교제권에서 영적 부흥을 맛보았던 나로서는 그의 관후정대함에 늘 감탄하고는 하였다. 그의 관계중심의 삶속에서는 미워할 사람이 없었다. 언제나 이타주의에서 나오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이해일 것이다. 듣건대는 암 투병속에서도 그는 아주 밝고 행복한 매일 매일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60세가 체 못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평범속에 비범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먼저 떠났다. 들꽃같이 청초한 그의 아내를 두고 떠나는 것이 제일 안타까웠겠지만, 그의 죠이 웹 매스터로서의 충성은 죠이어들에게는 전설이 될 것이 분명하다.


오세진

서울 문안에서 태여난 알부자였지만 그의 생애는 검소함 그 자체였다. 평생 영락교회를 출석하면서 그의 재력이라면 중직에 오르고 남았겠지만- 이런 말 자체가 그에게는 합당치 않겠으나- 그는 집사로서 충성 봉사하다가 젊은 나이에 갔다. 건국대 축산과를 졸업하고 한국 낙농업계에 큰 인물이 되리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의 사업은 그렇게 형편이 좋은 적이 별로 없었다. 오집사는 47년생이 태반이었던 당시 죠이에서 막내와 같았지만 얼마나 젊잖은지 호형호제하여도 탈없을 그런 인물이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일이라면 바로 오세진집사를 두고 한 말일 정도로 그의 부를 그리스도의 선한 사업에 쏟아 부었다. 아마도 70-80년대를 살았던 가난한 형제들이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이 드물 것이다. 그의 말년에 수목원을 경영하면서 정성을 다했다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저를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경과 그리움의 매듭을 묶어 놓았다.

하나님께서 박영원 리춘이 노광호 오세진같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을 왜 그렇게 일찍 부르셨을까? 알 듯 하면서도 모를 일이다. 그저 오늘은 찬송가 289장 3절을 불러 볼 뿐이다. “앞서간 친구를 만나 볼때 기쁨이 내맘에 차려니와 주께서 날 맞아 주시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지극한 영광 내 영광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