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한인 목회 연구원(원장 정영만 목사) 3월 정기모임이 지난 3일(화) 오전 10시30분 워싱턴연합장로교회(담임 안현준 목사)에서 열렸다.

이 날 주제발표는 윤치현 목사(새생명개혁장로교회)가 “성만찬 목회의 회복을 바라며 드리는 단상”이란 제목으로 진행했다.

윤 목사는 “한국 개신교회가 성찬보다는 말씀 부분을 강조함을 통해 누리는 유익도 있지만 그로 인해 말씀의 가벼움, 말씀의 희화화를 초래하게 됐다.”며 “예배의 회복을 바라며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심정으로 그 동안 가볍게 여겨왔던 성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윤 목사는 “성찬이 단순히 예배가운데 드려지는 한 의식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정교회 예전신학자인 알렉산더 슈메만이 지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라는 책을 소개했다. 책에서 슈메만은 “성찬을 예배가운데 드려지는 한 의식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드리는 예배전체가 성만찬의 행위이고 더 나아가 교회자체가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성만찬이다.”라고 해석한다.

이어 윤 목사는 “성만찬은 주님이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 때 이 예식을 행하며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이다.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들이 많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확실한 방법이다.”며 성만찬의 중요성과 유익함을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윤 목사는 “성만찬은 우리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라면 그곳에 반드시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회들이 이제라도 성만찬이 주는 풍성함과 유익함을 알고 자주 이 예식을 행함을 통해 예배의 풍성함과 하나님과의 교통을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전했다.

워싱턴 한인 목회 연구원은 매월 정기 세미나를 통해 이민목회의 새로운 정보와 목회에 필요한 신학적 토대를 복음적, 성경적인 방향으로 연구 발표하며, 목회 현장의 문제점들을 점검, 동역자들에게 제공하고 격려하고 있다.

문의 : 원장 정영만 목사(571-276-1886)

<성만찬목회의 회복을 바라며 드리는 단상> 전문
발표자:윤치현목사

1. 들어가는 말
한국 개신교회는 이상하리만치 성찬에 대해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성찬은 1년에 겨우 몇 차례 행하는 것으로 그치는 실정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원형이라고 말하는 초대교회의 예배는 예배때마다 항상 성찬이 포함된 예배를 드렸다. 우리 한국 개신교회가 성찬보다는 말씀(설교) 부분을 강조함을 통해 누리는 유익도 있지만 반면에 성찬을 포기함을 통해 잃는 것도 제법있다. 예를들면 말씀의 넘쳐남, 말씀의 가벼움, 말씀의 희화화를 초래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제 예배의 회복을 바라며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심정으로 우리가 그 동안 가볍게 여겨왔던 성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해야 할 때이다. 이것은 예배의 개혁을 위한 길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개혁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이 글은 성만찬의 교리적인 해석을 논하려는 것이 아님을 먼저 밝혀둔다.

2. 성찬의미의 재해석
성찬은 단순히 예배가운데 드려지는 한 의식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찬의 의미에 대한 보다 폭넓은 해석이 필요하다.

정교회 예전신학자인 알렉산더 슈메만은 그의 책”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For the Life of the World”라는 책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보다 넓은 지평으로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성찬은 예배가운데 드려지는 한 의식의 차원을 넘어 성찬을 우주적인 지평으로 넓힌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전체가 성만찬의 행위이고 더 나아가 교회자체가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슈메만은 성만찬예전을 ‘예전적’, ‘제의적’관점에서만 접근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예전을 지칭하는 Liturgy의 원어 헬라어 ‘레이투르기아’(leitourgia)의 본래 의미와는 다르다고 한다. 본래 이 말은 일단의 사람들이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 이상의 무엇이 되도록 해주는 공동의 활동을 뜻했다. 또 그 말은 전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한 사람 혹은 몇몇 사람들이 행하는 기능 또는 ‘사역’을 의미했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이 메시아의 오심에 대비해 세상을 준비시키는 공동의 일이 바로 ‘레이투르기아’였다.

이처럼 그는 부름받은 공동체인 교회 자체를 레이투르기아로 보고 이 세상속에서 그리스도를 좆아 살며 그 분과 그 분의 나라에 대해 증언하는 사역과 소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성만찬은 교회가 주님의 기쁨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라고 본다. 그렇게 그 기쁨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세상 속에서 그 기쁨의 증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바로 교회의 소명의 핵심이며 교회의 본질적인 ‘레이투르기아’이며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성례라고 한다.

슈메만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자체가 곧 성만찬임을 주장한다. 그는 예수께서 세상의 생명을 주려고 왔다고 할 때 그 생명은 단순히 초월적인 종교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세상에서의 삶을 단순히 개선시키는 정도의 삶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만찬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위해 먹는 문제를 끄집어낸다.

그는 인간은 그가 먹는 그것이다(Man is what he eats)라는 포이에르바하의 명제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전개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의 중요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성경의 창조이야기에 의하면 인간은 먹어야 하는 존재로 세계 전체는 그의 먹을 거리로 제시되어있다.(창1:28-29). 인간은 살기위해서 먹어야 하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세상을 자신의 몸 속에 받아들여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자신의 살과 피로 변모시켜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정말로 그가 먹는 것이 본질인 존재이다. 그리고 온 세상은 인간을 위해 차려진 하나의 거대한 잔칫상이다. 이러한 향연이미지는 성경전체에 걸쳐 생명을 나타내는 중심의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마지막 종말때에도 사용된다.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눅22:30)

성경의 관점에서 인간이 먹는 음식, 인간이 취하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선물이며, 하나님과의 교통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의 음식으로서의 이 세상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그 모두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그래서 인간의 삶을 하나님과의 교통이 되도록 하기위해 존재한다. 이 세상은 우리를 위한 음식, 우리를 위한 생명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슈메만은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죄와 타락을 설명하고 있다. 원죄는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기보다 세상을 하나님과의 교통이 아닌 그 자체를 위한 물질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선물로 받은 세상을 감사로 하나님께 봉헌하는 성만찬적인 삶을 살아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생명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 갈망이 있다고 갈파하며 인간은 하나님을 먹어야 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3. 성만찬의 중요성과 유익함
칼빈은 성만찬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1년에 한두 번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한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다.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은 적어도 크리스천들이 매주 한 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해야 한다."

1)성공회신부의 농담- 우리는 인테넷종교가 확산되어가도 걱정안한다. 왜냐하면 떡과 잔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에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2) 주님이 제정하신 것이고 주님의 명령이다
주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때 이 예식을 행하며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분부하셨다.

3)성만찬 자체만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통, 임재를 경험케 한다.
에콰도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곳에서 28세의 나이로 순교한 제임스 엘리옷은 자신의 일기에서 성만찬의 은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주일, 지난 며칠에 비해 내면에 큰 기쁨을 누린다. 성찬식이 좋았다. 단순히 그분을 기억하는 시간, 여기서 특히 성찬식의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낀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 말고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말이다. 과거의 일들을 깨끗케하고 새로운 현실을 추구하면서 계속 마음을 다잡아 그리스도를 좆는데 성찬식이 큰 도움이 된다.” (전능자의 그늘)
본인이 속한 교단의 어른이셨던 문익환목사는 감옥에서 배급되는 빵과 물을 통해 성찬예식을 행하며 그 감방에 주께서 함께하심을 체험했노라고 고백한다.

4)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확실한 방법이다.
성찬은 보이는 말씀이며 우리에게 복음의 은혜를 그림처럼 보여 준다--성 어거스틴
설교학자들이 정의하는 바른 설교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설교’라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성만찬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확실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게 해 준 것도 떡과 잔을 나눌 때임을 누가복음은 밝히고 있다.

5)개인적경험 – 본인이 집례하는 성만찬예식을 통해 많은 유익을 누렸노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간증을 접한다.

4. 성만찬의 실제
1)횟수의 문제- 얼마나 자주 행할것인가?
2)집례방식에 대한 문제- 예식서의 규례를 따를 것인가? 간소화한 예식으로 할 것인가?
3)분병 배잔의 문제- 누구에게 먼저 베풀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받을것인가?
4)성만찬 재료의 문제- 포도주or 포도쥬스, 빵 or 밀떡
5)집례자 몫의 떡과 잔 필요

5. 나가는 말
성만찬은 우리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라면 그곳에 반드시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회들이 이제라도 성만찬이 주는 풍성함과 유익함을 알고 자주 이 예식을 행함을 통해 예배의 풍성함과 하나님과의 교통을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