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의 목사이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를 보면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평범한 위인(偉人)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운 좋아 신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그의 소원은 소학교만 졸업하면 점방에 취직하여 상급학교 진학할 돈을 벌고 그리고 졸업 후에는 작은 사업을 해 또 돈을 벌어 장가를 들고 어머니에게 인삼 보약을 해드리는 소박한 꿈을 가진 시골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오로지 돈 버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표였을까? 신부가 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우연히 신부 서품을 보고 온 어머니의 당부에 그저 순종하여 신부학교에 간 것이 결국은 추기경자리에 까지 오르게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당연히 그의 문벌은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그는 학생시절에 한 번도 비범한 위치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황국신민에 대한 감상문을 써내라 했을 때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므로 당연히 감상이 있을 리 없다’는 단호한 답안지를 냈을 때까지 아무도 그를 눈 여겨 보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당황한 장면교장에게 뺨 한차례 맞았지만 그 일로 일본 유학을 주선 받게 되었다.

해방후 그의 신부 수학은 계속되어 졸업 서품후 대구 계산동 성당을 시발로 각 곳의 성당을 순례하면서 주임신부로 혹은 학교 교장 신부로 전전하는 가운데서도 그의 비범함을 알 아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장난을 좋아하는 엉뚱한 신부라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가 로마 신학교에 유학 사회윤리를 전공하여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생각이 트였을 때 그의 비범은 빛나기 시작하였고 교황청의 총애로 가장 연소한 나이에 질시를 받아가며 노기남대주교의 후임으로 서울 대 교구장에 오른 후 2년도 못돼 역시 최연소 추기경의 반열에 오르니 세상적으로 말하면 벼락출세를 한 셈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비범한 출세가도 속에서 보여준 그의 행로는 평범 그 자체였다. 그는 신부로서의 소명을 늘 고민하였고 그의 사명에 대하여 언제나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신군부의 권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맞선 그의 기백은 그의 평범함 속에 숨어 있던 비범이었으나 그의 생활은 언제나 장난기 많은 소년같은 평범함이 주장하였다. 그의 세마디 말 중에 한 마디의 말은 농이었다고 할 만큼 유모어 감각이 뛰어난 분이었다. 그는 주어진 추기경자리만 아니면 그저 인심좋은 시골 할아버지의 풍모를 지닌체 한 세상을 산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평범속에서 그는 그저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소처럼 일 한 사람이다.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의 친구로 언제나 성탄절을 그들과 함께 보내고는 하였으며 소문없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나타나 편이 되어주는 예수 사랑의 실천자였다. 그의 노년에 어느 인터뷰에서 눈물이 그렁 그렁한체로 ‘예수가 나같은 것을 이처럼 사랑하셨는데 나는 정말 소외된 자들을 위해 얼마만큼 헌신하면서 사는지 부끄럽다’라고 진솔하게 말할 때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길게 김수환이란 이를 찬하하는 것은 그가 추기경이라서가 아니라 한 자연인으로서 평범 속에 보여준 비범을 높이 사는 까닭이다. 오늘 개혁 교회 안에 평범을 벗어버리고 비범을 입는 사람은 많아도 비범하지만 언제나 평범함을 잃지 않는 위인(爲人)들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