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선교사 이기풍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협력하기 위해 제주도로 파송된 이선광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제주도는 말과 문화 등 지역풍속이 한반도와 많이 상이할 뿐만 아니라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이 깊숙이 깔려 있는 주변 지역이었기에 해외선교지로 충분했고, 이러한 정황이 이선광을 전도인이기 이전에 선교사로 보게 된다.

1907년 9월 17일 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최초로 안수 받은 목사 7인중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이기풍의 선교보고를 기록한 1908년 제2회 독노회 회록이 이선광의 파송의 계기를 만들었다. 본 독노회가 "제주 전도하는 일은 잘 되옵는데 원입인 아홉 사람이 오며 매주일 모이는 사람은 이십여 명"으로 "선교사 이기풍씨가 제주 전도 형편을 대강 설명하매 회중이 박장 감사하니라"고 한 이기풍의 선교 사역 보고가 그 계기다.

이러한 정황에서 길선주와 김홍년, 방기창이 거론한 여성 선교사 파송은 자연스러웠다. 다시 독노회 회록에 귀를 기울여 본다: "길선주씨가 제주 전도인 김홍년씨의 설명 듣기를 청원하매 회중이 '가'로 결정하고, 제주 전도인 김홍년씨와 전도국장 길선주씨가 설명하여 전도사를 확장하자고 청원하기"로 했고, 1908년 9월 8일 하오에는 "방기창 씨가 제주 부인들의 정형이 위선 가석하오니 전도국으로 할 수 있사오면 여전도인 한 사람만 택송케 하기로 동의하여 '가'로 결정하였다."

1909년 9월 3일 평양신학교에서 회집한 장로회 제3회 독노회 전도국장 길선주의 보고에는 이미 이선광이 파송되었고 그의 업적이 소개되었다. 이선광의 파송 절차가 회의록에 삭제됨으로써 한국인의 “빨리빨리”선교가 이때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회의록은 "평양성교회 자매들이 연보하여 이씨 선광을 제주 여전도인으로 파송하여 저간에 부인네 중에 열심히 주를 믿는 자매들이 생겼"음을 확인한 후 이선광의 제주도 선교 사업의 성과에 감사하면서 “선교사 이기풍씨가 제주에 전도되는 형편을 일일이 설명하시며 … ... 부인 전도회로 파송된 이씨 선광의 수고하심을 일장 감사하매 회중이 방기창, 이치수 양씨의 기도함으로 찬송, 감사하다”고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이선광은 이기풍이 최초로 개척한 성내교회에서 팀목회를 실험했다. 1950년 전후 성내교회에 이기풍의 공적비와 함께 이선광의 공적비가 함께 있었다면 이선광의 제주 여성 사역이 남긴 탁월한 공을 짐작케 한다. 본 독노회는 이선광의 사역의 공헌을 인정하여 이선광의 제주도 파송을 1년 더 연장하였고, "평양에 있는 여전도회에서 이씨 선광을 택하여 제주에 여선교사로 파송하여 5년간 계속 전도케 되었느니라"고 기록한데서 평양 여전도회가 이선광의 선교사역을 위하여 5년 선교 후원 연장을 확정했음을 알게 된다. 이선광의 선교사역은 평양으로 되돌아와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였다고 보면 된다.

제주도 선교에서 보여준 이선광의 선교 사역은 몇가지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첫째, 1912년 한국 장로교회가 총회를 조직하고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일대 계기를 제공했다. 둘째, 이선광의 협력이 가세한 소위 팀사역이 가치있는 선교 전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셋째,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 여성적 선교에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했다. 넷째, 선교 사역에 있어 남녀 협력적 모델을 실험한 현장이었다. 다섯째, [평양노회 여]전도회가 선교의 본래 목적을 착실하게 수행함으로서 선교구조의 본질을 규명하고 있다. 개교회의 어머니역할로 전락한 오늘날의 여선교회가 선교구조를 포기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고심해야 할 부분이다. 여섯 번째, 이기풍이 선교사로 파송받은 반면에 이선광이 공식적으로 선교사로 파송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교사 자격의 의미를 재평가하라는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선광전도사의 파송에 관한 회의나 회의 기록을 무시한 “빨리 빨리”선교를 반성케 한다.

/손상웅 목사(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