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소한 일로 아들과 아버지가 오랫동안 반목하며 지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위독하게 되어 임종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다른 주에 살던 아들은 이 소식을 듣자, 자신의 불효를 크게 뉘우치며, 어찌하던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겠다는 결심가운데 전 속력을 다하여 아버지의 병상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도착하니 안타깝게도 2시간 전에 아버지는 이미 운명하셨습니다. 차가운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며 불효자를 용서해달라고 울부짖다가 문득 옆의 탁자에 아버지 필치로 적힌 종이 한 장을 발견합니다. 아버지는 이와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나는 너를 용서한다.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 이 글을 움켜쥔 아들의 감격이 어떠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결국은 인생의 종착역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원합니다. 제자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메시지도 결국은 사랑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 주님이 잡히시던 날 저녁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그리고 예수님은 무릎을 꿇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셨습니다. 주와 선생이 되신 그 분이 제자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자신을 저주할 베드로에게도, 자신을 배신할 유다에게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빌라도 앞에서도 죄인의 몸이 되어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이보다 앞서 우리 주님은. 온 세상을 구원키 위한 쓴 잔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무릎 꿇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은 무릎을 꿇는 사랑이었습니다. 무릎 꿇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정도를 넘어 허물을 씻어주시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목회를 하며 사랑은 무릎 꿇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아직도 어리고 연약한 성도들을 목양하는 목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저 무릎 꿇는 것뿐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곤 하지요. 그리하여 중보의 무릎을 꿇으며 기도하는 일을 목회의 가장 우선순위로 여겨왔습니다. 또한 아직 멀었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하여 무릎 꿇으셨던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저도 그렇게 겸손히 성도님들을 섬기기를 늘 소원 합니다. 그래서 더 마음을 낮추어주시고, 더 겸손한 종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 항상 계속되는 저의 기도제목입니다. 어쩌다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면 마음이 아픈 중에도 이러한 기도가 나옵니다. "주님, 저를 이렇게 낮추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정말 주님처럼 무릎 꿇는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허물을 덮는 것을 넘어 허물을 씻어주는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발렌타인데이가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줄 선물을 찾는 발걸음들이 상점가로 이어집니다. 바쁜 현대인들이 사랑을 위하여 발걸음을 멈추고, 사랑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발렌타인데이는 아름다운 전통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표현이 그저 하루의 선물 교환으로 그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발렌타인데이를 맞이하는 저의 바램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서로를 겸손히 섬기는 무릎 꿇는 사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위한 중보의 무릎을 꿇는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용서를 빌기 위하여 겸손히 무릎 꿇고, 실망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자들을 사랑으로 안아 주기 위하여 무릎 꿇는 용서와 용납과 격려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처럼 무릎 꿇는 사랑이 우리 교회에 번져갔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주님처럼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뿐 아니라, 나아가 허물을 씻어주기 위하여 무릎 꿇는 사랑의 계기가 마련되는 발렌타인데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