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경기침체로 인하여 생활이 각박해 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주위에 분(Anger)을 내는 사람들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일반사회에서나, 더 나아가 미국의회와 백악관에서도 직접 듣거나 미디어를 통해 많이 접하게 됩니다.

미국일반시민들은 폭락이 아니라 곤두박질을 한 월가 주식시장의 자금관리경영자들이 작년에 무려 180억 달러의 보너스를 받은 것에 대하여, 근래 오바마행정부의 2지명자가 세금을 포탈한 것에 대하여, 수근 수근하며 분노를 터트리고 있습니다.

미국의회의원들도 적지 않게 분노를 토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청문회에서는 50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다단계금융사기를 한 메이도프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증권거래감독기구(Security Exchange Commission)에 대하여 심도 있는 질책과 분노를 쏟아 놓았습니다.

바락 오바마 새 미국대통령도 금번 금융위기와 관련해서 분을 발하는 데에는 뒤지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와 관련해서 취임연설에서 “탐욕과 책임” (Greed and Responsibility)이라고 완만한 분노를 나타내더니, 월가의 거액보너스소식에 대하여는 “수치스럽다” (Shameful)라고 하였고, 또한 구제금융을 받는 회사의 경영자의 봉급을 50만 달러로 제한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 사람들을 진정 분노(Upset)케 하는 것은 최고경영자들이 실패했는데도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라고 강도있게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이번 금융위기의 주범 중 하나가 월가의 금융자금관리자일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경제전체를 망가트려 놓고 보너스잔치를 벌리고 있다는 사실에 저도 “돈밖에 모르나?”,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고 적지 않은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이기심이나 성격적인 탓으로 인해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성숙된 사회인으로서, 더 나아가 기독인으로서 당연히 피해야 할 일이겠지만, 분노의 대상이 엄연한 탐욕과 부정의와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 것에 대한 분노는 “올바른 분노”(?),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을지, 아니면 그러한 개념이 있기나 하고 있을 수 있는지 묵상하게 해 줍니다.

전자의 분노를 개인적인 분노라고 하고 후자의 분노를 사회적인 분노라고 잠정적으로 구분하는 경우 사회적인 분노에 대하여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합당하고 좋은지 분노관리방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현대사회와 같이 복잡하고 이해관계가 얼키고 설킨 생활 속에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분노를 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가정에서나, 일반사회생활에서나, 기업경영에서나, 분노관리방안에 대한 연구와 상담이 크게 성행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주로 인간의 심층심리를 분석 연구하여 얻은 방안으로서, 분노관리방안으로 대략 ‘자기관리방안’과 ‘관계관리방안’의 2가지로 대별됩니다. 문제인식, 물러서기, 안정, 환경재구성/환경바꾸기 등이 전자에 속하고, 적절한 반응, 감정이입, 적절한 대화, 용서 등은 후자의 분노관리방안으로 제안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인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어떻게 분노를 관리해야 하는지, 경제위기로 각계각층에 분노가 충만(?)한 이 시기에 의미있는 목상거리라고 여겨집니다.

먼저 분노의 주관자가 누구이냐하는 문제입니다.

절대적인 의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악을 그의 섭리 안에서 허락도 하시고, 죄를 용서도 하시지만은, 악과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심판하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지신 분, 즉 그 것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이며 근본적으로 죄인인 인간은 불의에 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분노를 할 수 있는 자격도 없고 분노의 주관자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의의 주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불의한 것을 대하면 분노를 갖게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이 당연한 현상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어나는 분노를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독인의 삶을 살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노관리방안으로 소극적인 방안과 적극적인 방안 등 2가지 방안을 가르쳐 줍니다. 소극적인 방안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라, “분냄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하는 것입니다. 불의 및 악에 대한 분노라고 하더라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기독교의 근본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사상은 이에 끝나지 않습니다. 분노관리의 적극적인 방안으로 “인자하게 하며 .... 불쌍히 여기며 .... 용서하라”고 권고합니다. 불의나 악 자체가 아니라 불의를 행한 자에게 분노대신에 오히려 인자와 불쌍히 여김과 용서를 하는 적극적인 자세와 행동이 성경이 가르켜 주는 분노관리방안인 것입니다.

인자와 불쌍히 여김과 용서는 분노관리와 관련해서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이 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시어서 직접 모범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의에 이르는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과거와 현재의 사람을 감싸 안는 것일 뿐만아니라 미래의 사람을 다시는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이 것이 사랑, 특히 용서를 베푸는 참된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가서 다시는(앞으로는) 죄를 범치 말라”라고 권고하신 것이나, 바울이 사랑의 특징으로 “사랑은 .... 모든 것을 바라며(희망하며)”라고 강조한 것이나, 요한이 사랑을 “오직 행함(일)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역설한 것은 바로 사랑에는 미래적인 행위를 요청하고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바라며’, ‘행함’은 곧 사랑의 미래성과 적극성을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경제위기와 관련된 분노관리방안으로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조금 비약된 영적인 묵상일지는 몰라도 금번 세기적인 금융위기의 주동자들에게 그러한 불의를 다시는 하지 않도록 경제행위자세를 가르쳐 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경제제도장치를 마련하는 것일 것입니다.

전자의 자세확립과 후자의 제도설정이 교육이나 정치가 담당해야 할 사명이겠지만, 우주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것들을 교육이나 정치에만 맡겨 둘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인 기독인들이 짊어져야 할 사명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것이 바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백 순, 미국노동성선임경제학자/지스카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