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받은 자의 행동강령 두 번째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쓰인 죄인이란 말의 원어의 뜻은 목표를 맞추지 못한 사람이란 뜻이다. 사람은 본래 창조될 때 목적을 가지고 지음을 받았다. 인생에게는 각각의 목표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조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부단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서만 참 복이 창출된다. 그러나 죄인의 길에 선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를 않는다. 로마서 1:21절에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했다. 죄인들이라 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자연만물에 나타난 신성(롬1:20)과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그 양심에 새겨져(롬1:19)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러 하나님을 잊고 살려고 한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 목표를 거부하는 까닭이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놓고 자신만이 잘 되기를 염원하는 까닭에 시편 기자는 이를 갈파하여 ‘죄인의 길에 선 다’고 한 것이다.

이 세상사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죄인의 길에 설 것인가? 의인의 길에 설 것인가? 를 선택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출세의 관건은 실력보다는 줄을 잘 서는가에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그래서 血緣, 地緣, 學緣 하다못해 이제는 敎緣까지 등장하고 있는 터이다.

교연 내가 만든 신 종어 인데 敎會緣이다. 이 정부 들어서는 소망교회 연줄에 서 있지 않으면 출세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지연은 어떤가? 옛날에는 그래도 그 지역 폭이 넓어 영남이니 호남이니 그랬는데 이제는 영남도 부산, 대구가 다르다.

더 가관인 것은 서울에 살아도 강남이냐 강북이냐가 다르다. 그래서 강부자 소리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줄에 기를 쓰고 서보지만 결국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됨이 태반이 아닌가? 한 때 줄 잘서 떵떵거리다가 일순간 수갑 차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 많이 본다. 그럼에도 어디 연줄이 없는가 하면서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대통령 부인의 사촌언니에게라도 연줄을 대어 보겠다고 검은 돈을 주고 받는 세상이다. 세상 사람만 그런가? 부끄럽지만 교계나 교회 안에는 이 줄서기가 더욱 기승하여 영계를 부패하게 한다. 교권을 가진 자에게나 소위 부자교회에 줄을 대지 못해 애쓰는 정신 없는 지도자들이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일부 교권자들이 작심하고 줄을 세운다. 만약 그 줄에 서기를 거부하면 그 사람은 그것으로 끝이다. 내 친구가운데 한 분은 그 줄 서기를 거부했다가 그 교단에서 아주 이단아 취급을 받고 쫓겨 났다.

소위 줄 세우기이다. 이것이 사회도 영계도 망하게 하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마땅히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그 줄에 당당하게 서있는 사람도 있고, 발각 되 히죽이 웃는 사람도 있고, 부끄러워 숨는 자도 있다.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죄인의 길에 서 있는 교인들이 많아진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화무도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했고 혹은 권불십년 이란 말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전히 줄서다가 한 세상 다 보내는 사람이 있다. 성경은 말한다. 복 있는 자의 행동강령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