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는 80년이나 된 낡은 건물이었다.물론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5층 원 베드룸에 7명이 함께 룸메이트로 생활하고 있었다. 방에 침대 두 개를 놓고, 거실에 침대 다섯 개를 놓았다. 집기라고는 방 안에 있는 전화기와 19인치 TV 한 대가 전부였다.
아침은 먹는 사람이 없고 일어나자마자 일터로 나갔다. 점심은 각자 직장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집에 와서들 먹었다. 우리는 한 주에 10불씩 거둬서 생활비로 썼다.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동양 식품점이 있어 주로 두부찌개나 콩나물국, 미역국 등 조리하기 쉬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배추가 비싸서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었다.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식탁이 없어 한동안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먹다가 얼마 전부터 밀크 박스를 놓고 식사를 하게 되었다. 모두가 사정이 비슷비슷했다. 부지런히 돈을 벌어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야 했다.
나는 당장 침대가 필요했다. 그러나 수중에 있는 돈은 200불이 전부였다. 그래도 침대는 있어야 했다.
"이 집사님, 침대는어디서 샀나요?"
이 집사님은 한국에서 한 교회에 출석하던 신앙의 동지였다. 나보다 한 달 먼저 이곳에 와서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 주는 사이가 되었다.
"침대요? 안 샀어요. 주운 거에요."
화요일마다 쓰레기가 나오는데 골목 골목 뒤지다 보면 어쩌다가 쓸 만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주운 거라면서 화요일에 같이 나가 보자고 했다. 나는 형편이 형편인지라 오히려 잘되었다가 생각했다.
미국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곳이지만 아무나 쉽게 올 수 없는 곳이라서 더욱더 오기를 원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길거리에는 웬 개똥이 그렇게도 많은지 밤길에는 자칫 조심하지 않으면 개똥을 밟기 십상이었다. 아파트에는 바퀴벌레가 우글거리고, 쥐새끼들도 자주 들락거렸다. 또 지하철역은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하며, 동네든 역이든 온통 스프레이 낙서 투성이였다. 게다가 이곳에는 흑인들이 꽤 많이 살고 있어 흑인을 볼라치면 괜히 겁이 나고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은 나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 빨리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하루는 신문을 보고 야채 가게를 찾아갔다. 주인은 이것저것 물어 보고는 일이 많이 힘들다면서 몸이 좀 약해 보이는데 몸무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52킬로그램이라고 하니까 그 체중으로는 야채 가게에서 일 하기는 어렵겠다며 몇 달 못 가서 골병이 드니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퇴짜를 놓았다.
그럭저럭 한 주간을 보내고 이 집사님의 권유로 맨하튼 봉제 공장에 취직을 했다. 다리미질도 하고 와이셔츠 단추도 잠그고 마무리하는 일을 주로 했다. 아침 8시까지 출근해서 일하다가 일거리가 떨어지면 바로 퇴근하고 일이 있으면 5시까지 일을 했다. 임금은 주급으로 따지면 150불 정도는 되었다. 공장에는 한국 사람도 많고 스페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의 미싱을 돌리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얼마나 신속하게 움직이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쉬지 않고 너무나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하느냐니까 한 피스라도 더해야 돈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는 숫자만큼 돈을 계산해서 받는다는 것이다. 달러 벌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빨리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달 정도를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룸메이트 한 씨가 야채 가게를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다면서 와서 일을 좀 도와달라고 했다. 거절할 수도 없는 처지라 승낙을 하고 다음 주부터 야채 가게로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큰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3월 하순에 안우철 집사가 미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함께 한 교회에서 섬기던 집사님이었다. 한동규 형제는 집 앞에 있는 감리교회에 다니고, 이증익 집사님은 근방에 있는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두 곳을 번갈아 방문해 봤지만 선뜻 등록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 집사, 이 집사와 더불어 다른 교회를 알아보기로 하고 수소문한 끝에 브롱스 한인 동산 장로교회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이백호 전도사님이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 오셨다. 전도사님도 우리들과 비슷한 처지로, 가족은 모두 한국에 있고 혼자만 와 계신다고 했다. 교회에 도착한 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교회를 정하지 못해서 찾고 있으며 당장 등록을 안 하더라도 이해해 주십사하고 미리 말씀을 드렸다. 예배를 드리고 이은수 목사님과도 인사를 나눴다.
집으로 돌아온 후 우리는 서로 의논해 보았지만 결정을 보지 못하고 근방에 있는 다른 장로교회를 한 주 더 방문해 본 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웃 교회를 방문해 보았지만 왠지 우리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동산 장로교회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예배 형식이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와 똑같은 것이 마음에 들고, 목사님과 전도사님, 그리고 교회 분위기도 좋은 것 같았다.
셋이 동산 장로교회를 섬기기로 결정하고 1986년 4월 셋째 주일 정식으로 등록한 뒤 출석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22년간 동산 장로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때 만난 이은수 목사님과 이백호 전도사님(현재 목사님)은 나의 이민 생활과 신앙생활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천사들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민 생활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수호천사처럼 나를 도와주신 두 분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침은 먹는 사람이 없고 일어나자마자 일터로 나갔다. 점심은 각자 직장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집에 와서들 먹었다. 우리는 한 주에 10불씩 거둬서 생활비로 썼다.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동양 식품점이 있어 주로 두부찌개나 콩나물국, 미역국 등 조리하기 쉬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배추가 비싸서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었다.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식탁이 없어 한동안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먹다가 얼마 전부터 밀크 박스를 놓고 식사를 하게 되었다. 모두가 사정이 비슷비슷했다. 부지런히 돈을 벌어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야 했다.
나는 당장 침대가 필요했다. 그러나 수중에 있는 돈은 200불이 전부였다. 그래도 침대는 있어야 했다.
"이 집사님, 침대는어디서 샀나요?"
이 집사님은 한국에서 한 교회에 출석하던 신앙의 동지였다. 나보다 한 달 먼저 이곳에 와서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 주는 사이가 되었다.
"침대요? 안 샀어요. 주운 거에요."
화요일마다 쓰레기가 나오는데 골목 골목 뒤지다 보면 어쩌다가 쓸 만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주운 거라면서 화요일에 같이 나가 보자고 했다. 나는 형편이 형편인지라 오히려 잘되었다가 생각했다.
미국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곳이지만 아무나 쉽게 올 수 없는 곳이라서 더욱더 오기를 원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길거리에는 웬 개똥이 그렇게도 많은지 밤길에는 자칫 조심하지 않으면 개똥을 밟기 십상이었다. 아파트에는 바퀴벌레가 우글거리고, 쥐새끼들도 자주 들락거렸다. 또 지하철역은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하며, 동네든 역이든 온통 스프레이 낙서 투성이였다. 게다가 이곳에는 흑인들이 꽤 많이 살고 있어 흑인을 볼라치면 괜히 겁이 나고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은 나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 빨리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하루는 신문을 보고 야채 가게를 찾아갔다. 주인은 이것저것 물어 보고는 일이 많이 힘들다면서 몸이 좀 약해 보이는데 몸무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52킬로그램이라고 하니까 그 체중으로는 야채 가게에서 일 하기는 어렵겠다며 몇 달 못 가서 골병이 드니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퇴짜를 놓았다.
그럭저럭 한 주간을 보내고 이 집사님의 권유로 맨하튼 봉제 공장에 취직을 했다. 다리미질도 하고 와이셔츠 단추도 잠그고 마무리하는 일을 주로 했다. 아침 8시까지 출근해서 일하다가 일거리가 떨어지면 바로 퇴근하고 일이 있으면 5시까지 일을 했다. 임금은 주급으로 따지면 150불 정도는 되었다. 공장에는 한국 사람도 많고 스페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의 미싱을 돌리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얼마나 신속하게 움직이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쉬지 않고 너무나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하느냐니까 한 피스라도 더해야 돈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는 숫자만큼 돈을 계산해서 받는다는 것이다. 달러 벌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빨리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달 정도를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룸메이트 한 씨가 야채 가게를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다면서 와서 일을 좀 도와달라고 했다. 거절할 수도 없는 처지라 승낙을 하고 다음 주부터 야채 가게로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큰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3월 하순에 안우철 집사가 미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함께 한 교회에서 섬기던 집사님이었다. 한동규 형제는 집 앞에 있는 감리교회에 다니고, 이증익 집사님은 근방에 있는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두 곳을 번갈아 방문해 봤지만 선뜻 등록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 집사, 이 집사와 더불어 다른 교회를 알아보기로 하고 수소문한 끝에 브롱스 한인 동산 장로교회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이백호 전도사님이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 오셨다. 전도사님도 우리들과 비슷한 처지로, 가족은 모두 한국에 있고 혼자만 와 계신다고 했다. 교회에 도착한 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교회를 정하지 못해서 찾고 있으며 당장 등록을 안 하더라도 이해해 주십사하고 미리 말씀을 드렸다. 예배를 드리고 이은수 목사님과도 인사를 나눴다.
집으로 돌아온 후 우리는 서로 의논해 보았지만 결정을 보지 못하고 근방에 있는 다른 장로교회를 한 주 더 방문해 본 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웃 교회를 방문해 보았지만 왠지 우리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동산 장로교회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예배 형식이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와 똑같은 것이 마음에 들고, 목사님과 전도사님, 그리고 교회 분위기도 좋은 것 같았다.
셋이 동산 장로교회를 섬기기로 결정하고 1986년 4월 셋째 주일 정식으로 등록한 뒤 출석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22년간 동산 장로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때 만난 이은수 목사님과 이백호 전도사님(현재 목사님)은 나의 이민 생활과 신앙생활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천사들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민 생활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수호천사처럼 나를 도와주신 두 분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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