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동대문 밖에서 출생한 이기풍이 6살에 사서오경을 읽는가 하면, 12살에 붓글씨로 장원하였고, 30세에 묵화를 그려 생활에 보탬을 얻었다면 총명했다고 하겠다. 이런 총명에다 이기풍은 의협심도 강하여 거만했던 평양 좌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옥살이를 하였다. 이기풍이 크리스천이 되기는 그의 의협심 때문인데 마펫선교사의 턱에 돌을 던져 상처를 입히는데서다. 그런데 턱을 맞은 마펫선교사에게서 인자한 얼굴을 본 이기풍은 청일전쟁을 피해 살러간 원산에서 스왈론선교사를 만나 그가 마펫인 줄 알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크리스챤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때가 이기풍이 30세 때다.

▲이기풍 선교사(왼쪽)
크리스챤이 된 이기풍은 원산에서 전도인이 되더니 더 공부해야겠다고 평양신학교로 가 마펫에게 용서를 받고 신학생이 된다. 이기풍은 스왈론과 마펫과 함께 순회전도에 동행하면서 권서인과 조사가 되기도 한다. 1907년 이기풍은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 중 한 명으로 졸업하여 목사가 되고 그 해 선교사가 되었다.

선교사로서의 이기풍은 백낙준이 말하는 대로 이기풍의 자원에서 이루어졌다. 크락(Clark)선교사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퀠파트(제주도)에 기쁘게 선교사로 나섰다고 썼다. 1907년이 평양부흥운동의 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선교사 파송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는 이기풍에게 두려운 마음이 없진 않았는데 이기풍의 사모 윤함애는 “우리가 안가면 누가 불쌍한 영혼을 구하겠어요? 두말말고 속히 떠납시다”고 선교사명을 세워나갔다. 말라리아로 죽을 뻔 하였는데 마펫의 기도로 살아나 그레이함리선교사의 양녀가 된 윤함애는 마펫의 중매로 이기풍과 결혼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은 조랑말로 외롭게 전도여행을 다니며 호미로 밭을 매며 예수를 전했지만 제주도 방언이 통하지 않았고, 천주교 학살 사건 후라 기독교에 대한 반대와 핍박이 심해 그만한 결실을 얻지 못했다. 마굿간에서 눈을 붙이고 영양 실조로 고생하고 죽을 고비를 건너면서 제주도를 사랑하였지만 말똥으로 불을 때고 쌀을 씻지 않고 밥을 짓는다는 제주도의 풍속을 적은 글이 한성신문에 실려 이기풍이 멱살을 잡혔는데 박대감이 말리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마침내 마펫에게 좌절과 절망의 편지를 부쳤는데 금방 답신이 와 뜯어보니 “이기풍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라는 엄중한 권면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앉은뱅이 소년이 일어나고 미치광이가 낫는 등 능력전도가 발생하면서 성경 말씀위에 성안교회가 창립되고, 이기풍이 떠난 제주도에 30개 교회가 설립되고, 1934년에는 노회가 조직되는 쾌거를 맞이한다. 그러나 사준과 사영 그리고 사라 등의 자녀들을 먼저 하나님께 보낸 이기풍의 아픔과 고통은 이러한 쾌거에 가려질 수 없었다.

이기풍으로 시작된 제주도 선교는 한국교회 선교역사에서 보면 ‘첫 번째’라는 몇 가지 교훈이 있다. 이기풍은 첫 번째 파송된 장로교선교사였고, 이기풍과 함께 사역한 이관선은 첫 번째 여자선교사였고, 김형재는 첫 번째 단기선교사였고, 이기풍과 이관선은 첫 번째 팀선교 사례였고, 일년에 한번 선교비가 지급되었다면 이기풍은 첫 번째 믿음선교 (Faith Mission)를 감당한 선교사였다.

/손상웅 목사(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