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누고 있다, 크로노스는 기계적 시간(Clock Time) 혹은 물리적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역사적 시간(Historical Time)인 동시에 절대 절명의 하나님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그 자체로는 영겁으로 흘러간다. 인간에게는 그 길이와 상관없이 한 때로 그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흔치는 않으나 어떤 분은 100세를 넘기고도 한 사발의 밥과 국을 너끈히 비우나 혹자는 벼라별 강장음식을 상복해도 60을 넘기지 못하고 크로노스의 세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인간에게 허락된 크로노스의 시간은 정확하게 일분 일초도 틀림없이 재깍 재깍 돌아가면서 마치 "부르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처럼 때가 되면 죽음이란 정거장을 통과해서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기계적 시간의 특징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강조하고 있다. 크로노스에 생기를 불어 넣으므로 여러 의미있는 역사적 시간들을 창출하게 되는바 살아 있는 자나 죽은 자에게나 이 카이로스는 중차대한 의미를 내포한다.

동양철학도 이 카이로스를 알았음인가? 일찍 12간지를 두어 흘러가는 세월 속에 주술적 의미를 두려고 했던 것 같다. 올해는 기축년 소띠인데 2009년이란 클럭타임을 기축년으로 명명하고 갖은 해석을 가하는 인간들의 염원이 가엽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허망한 기원보다는 내게 주어졌던 크로노스 속에 어떤 역사적 시간들이 내재했던 가를 회고하면서 얼마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기계적 시간 속에 역사적 의미를 불어 넣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적 시간 속에는 수없이 많은 절대 절명의 카이로스들이 잠복해 있다. 잠언 기자는 일찍이 이를 간파하여 그것을 수 없는 때로 분석하였다, 이를테면 학생들이 공부하여야 할 때가 있다. 선남선녀는 결혼하여야 할 때가 있다. 이런 보편적인 때가 있는가 하면 개인에게 주어진 특별한 소명의 때가 있다. 만약 이 절대 절명의 시간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크로노스는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슬피 울며 껄 껄 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카이로스의 시간들을 주시고 그 시간 사용에 대하여 엄격하게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이다. 그 누구나 크로노스 속에 있던 카이로스의 성적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직접 서야 하는 하나님의 시간이 다가오는 까닭이다.

사실 인간에게 주어진 크로노스는 일백세를 향수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시간 앞에서는 풀잎의 이슬과 같은 것이다. 복된 것은 세파가 험난하게 몰아치는 내일이 주어진다 할 지라도 2009년이란 크로노스가 주어져서 역사적 의미를 창출하는 기회가 주어졌고 카이로스를 붙들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는 챤스가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 부단히 다가오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재해석하여 후회없도록 그때 그 시간, 다시 오지 않을 그 시간을 후회없도록 사용해야 할 것인바 우리가 소유한 오늘이란 이 귀한 시간은 죽은 자가 소유할 수 없는 귀한 시간인 까닭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Give me a tomorrow!”라고 외쳤단다. 그 사람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내일은 다름 아닌 우리의 오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