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 한파가 한 해 동안 일어난 많은 사건, 사고들을 덮어버렸지만 성탄과 연말연시를 맞아 다시 한 번 끄집어내어 볼 필요가 있는, 아니 끄집어내어야 할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그 중에서도 110만 명이 넘는 결혼 이주 여성과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차별은 금년 한 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이슈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결혼 이주 여성과 이주 노동자 자녀 가운데 초중고에 다니고 있는 학생은 19,000여 명, 초등학교 입학 대상 아동은 46,000여 명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여느 아이들처럼 행복하게 살지 못하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있지 못하다고 합니다. 언어 지체, 따돌림, 사회적 차별, 부적응, 정체성 혼란, 그리고 이로 인한 학력 부진 등 여러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다문화 가정 자녀들의 초등학교 입학생 비율이 50%에 가까운 시골의 경우 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면 농촌은 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순혈주의와 유교 전통이 유난히 강한 우리나라에는 지난 20여 년 간 물밀 듯 유입된 외국인들, 그 중에서도 우리들보다 경제적으로 못한 동남아 국가에서 시집온 외국인 엄마들, 그리고 이들의 자녀들에 대해 심한 거부감과 편견이 있습니다. 경기도 가족여성개발원이 금년에 도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1,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다문화 이해 실태조사에 의하면 다문화가정 청소년과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비율이 무려 28.8%, 왠지 거부감을 느껴 피한다는 응답이 17.9%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특히 외국인과 접촉 경험이 없는 청소년일수록 또래 다문화 청소년에 대한 거부감이나 배척이 심하다고 합니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에 대한 보도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특히 지난 십 수 년 간 가족들과 더불어 캐나다에 나와 살고 있는 저로서는 한국의 다문화 가정이 겪는 어려움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주요 이민 국가들 중에서 캐나다는 그나마 가장 인종차별이 적다고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캐나다에서는 아예 헌법의 기본 정신에 복합문화정책을 삽입하여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다른 인종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인종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귀가 아프도록 가르치는가 하면 실제로 인종 혐오적 범죄나 언행은 가차 없이 엄벌합니다. 정치인들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가는 그날로 정치 생명이 끝납니다. 십 수 년 전의 일이지만 호주에서 폴린 헨슨이란 여자 국회의원이 아시아 이민으로 인해 실업률이 오르고, 지나친 복지 예산이 사용되며, 나라가 게토화 되고 있다고 주장하여 일어난 소위 “헨슨 파문”과 같은 일을 캐나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캐나다에서조차 드물게, 은근 슬쩍 인종차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가정적, 인종적 배경 등 선천적 이유 때문에 사회적 불이익이나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참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인종차별로 인해 심한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경험한 나라들의 전례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한 시기가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문화 가정과 그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에 대한 차별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국회는 법을 만들고, 정부는 이에 기초한 구체적인 정책을 개발, 시행해야 할 겁니다. 교육 기관을 통한 국민교육과 더불어 매스컴 등을 통한 사회교육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구밀도가 높고 집단주의적 특성이 강한 한국 사회는 매스컴에 의한 사회교육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들을 소재로 하는 좋은 드라마나 문학 작품들도 나와야 할 것입니다.

국내 다문화 가정의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저는 성탄의 의미를 다시 새겨봅니다. 성탄의 계절에 다문화 가정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에서 오신 분입니다. 우리는 죄 중에서 잉태되고 태어난 존재이지만 그 분은 죄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익에 눈이 멀어 이웃의 고통에 눈이 먼 자들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그 고통을 대신하고자 이 땅에 자원해서 오신 분입니다. 혹자의 말대로 성탄은 예수님이 ‘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낮아지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자원적 낮아짐, 즉 케노시스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모든 사람들이 다문화 가정, 나아가 모든 차별 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은 특히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죄와 불법이 성행하는 인간 문화 한 가운데 성육신 하신 예수님. 그 분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우리와 다른 문화, 특히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피부색이 다르다고 천대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우리들에게 사죄와 구속의 선물이 주어진 것처럼 우리들의 “성육신”을 통해 어려움을 겪는 다문화 가정과 그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전달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새해에는 “성육신”이 우리 모두의 모토가 되었으면 합니다.

/글 양승훈 교수(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 www.view.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