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내내 저는 자주 제 감정의 혼돈을 느꼈습니다. 점점 더 가까이 느껴지는 주님의 임재 속에서, 저는 만족하고 행복한 신부처럼 그저 기쁘고 감사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단의 노예가 되어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로 여전히 가득 채워진 지구의 모습, 믿는 자들조차 어두움과의 힘겨운 싸움가운데 지쳐가는 모습, 고통 받는 교우들의 어려운 사정들이 제 마음의 창에 비추어질 때, 저는 종종 슬픔의 무게에 압도되는 느낌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과연 나는 기뻐해야 하는가? 슬퍼해야 하는가? 이렇게 하여 저는 지난 주 기쁨과 슬픔에 대한 묵상을 하며 지냈습니다.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기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 항상 기뻐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기쁨은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기쁨이며, 그 기쁨은 우리의 슬픔을 삼키는 강한 속성을 가지기에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에수님의 모친, 마리아야말로 이 같은 신비한 기쁨을 소유한 여인이었습니다. 사실 마리아에게 예수님 잉태의 소식은 죽음과 파혼, 살아난다 해도 수많은 사람들의 경멸과 의혹에 찬 시선을 견뎌야 하는 큰 슬픔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뻐하고 찬양합니다. “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2:47) 마리아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뻐했습니다. 슬픈 현실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님을 주목하면서 그녀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그녀의 큰 슬픔을 삼켜버렸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알면서, 천국 보좌를 떠나야 했던 예수님께 성육신은 큰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기간 고통 받는 인생, 멸망 당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15:10,11). 그 기쁨은 사랑의 기쁨임을 말씀하셨고 우리도 사랑하면 당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기쁨은 십자가의 큰 슬픔을 삼켜버리는 놀랍도록 강한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머나먼 미지의 나라 지구라는 곳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악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았고, 결국 십자가 위에 못박았습니다. 인간들의 악함을 아시면서도 당신의 외아들을 지구로 보내시는 하나님 마음은 또한 얼마나 슬프셨을까요? 하나님의 희생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내린 사랑의 결단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구원받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겠노라 고백하시었습니다. “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습 3:17.

마리아에게도, 예수님, 하나님께도 성탄의 계절은 슬픔과 기쁨이 만나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 모두 큰 슬픔 속에서도 기뻐하셨습니다. 그 분들의 기쁨은 한 마디로 사랑의 기쁨이었고 그 기쁨이 큰 슬픔을 이겼던 것입니다, 점점 어두워지는 이 세상, 많이들 어렵다고 탄식합니다. 몰아닥친 불경기라는 한파는 성탄의 즐거움마저 빼앗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사랑하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어떠한 슬픔도 삼켜버리는 놀라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C.S. Lewis 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최대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 The dangerous duty of delight"에서 존 파이퍼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만족을 누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주님을 더 깊이 생각하며 경배하고 찬양합시다. 그러면 사랑의 기쁨이 우리의 심령에 차오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양하며, 기쁨으로 슬픔을 이깁시다.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 시 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