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농장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일부 작은 밭 한 줄기만 시범적으로 경작을 했다. 첫 봄 농작물은 한국산 검은 콩과 노랑참외였다.

그러나 한번도 경험이 없는 밭을 일구는 일은 여간 쉽지 않았다. 옛 ‘유덕농장’을 15년 전에 세미한장로교회(이주영 목사)가 구입해 휴경에 들어갔던 텃밭이라 온 사방이 각종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트랙터에 달린 틸러(tiller, 얕은 땅을 일구는 도구) 역시 잡초들의 깊이 박힌 뿌리들을 갈아엎는데 역부족이었다.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해 반은 손으로 땅을 파야했다. 물론 오랫동안 묵혀진 땅이라 영양분은 풍족했지만 잡초를 모두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파종할 시기도 늦고 해서 잡초를 제거도 다 못한 채 남아 있는 땅에 참외와 콩 씨앗을 뿌렸다. 물도 없고 전기도 끌어올 수 없는 처지였으나 다행히 맑은 개울이 세평농장 모퉁이에 졸졸 흐르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개울에서 물을 끌어다 밭에 뿌리는 일 역시 쉽지는 않았다. 이마에 굵은 땀을 흘리며 돌을 고르고 물을 길어오는 일에 지친 한 자원봉사자가 말했다.

“목사님, 지금 우리처지가 꼭 미국 개척자들 같아요. 청교도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처음 산을 일궈 밭을 매던 모습이네요. 옆에 말들만 서너 마리 있으면 완전 서부영화에 나오는 모습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청교도들처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연의 소산을 통해 더 큰 감사들을 배우게 될 겁니다.”

5월에 씨앗을 뿌려 6월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콩잎이 무성하게 올라오고 참외 떡잎이 점점 커지더니 줄기가 솟기 시작했다. 6월 중 순에는 이미 꽃이 오르고 땅콩만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줄기를 하늘로 쏟던 검은콩 잎이 사슴으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한마디로 거의 전멸이었다. 사슴을 막기 위해 그물로 담을 쳤지만 사람의 키 높이를 펄쩍 뛰어넘는 사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다행히도 사슴이 노랑참외는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 나에게 주된 관심사는 참외수확에 있었다. 6월말쯤 되었을 때 참외열매는 점점 커지더니 일부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참외지만 매우 탐스럽게 보였다. 나는 이런 참외를 사슴이 건드리지 않는 것은 사슴이 처음 보는 과일이라 한 번도 맛을 보지 못한 이유라 생각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7월 초에 참외를 수확하러 세평농장에 들렀을 때였다.
일부 참외들이 없어져 야밤에 누군가가 참외를 서리해 갔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역시 일부 참외가 없어졌다. 나는 기필코 범인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참외밭을 지키고 있었다. 순간 세평농장 연못 근처에서 인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보니 어미 사슴이 자녀들을 데리고 참외밭 울타리는 넘고 있었다. 주범이 사람이 아닌 사슴이었다. 내가 다가서자 사슴들은 먹던 참외를 내동댕이치고는 쏜살같이 도망을 쳤다. 드디어 사슴이 한국산 노랑참외 맛을 알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사슴이 참외 맛에 푹 빠졌으리라 확신했다. 나 역시 한국산 노랑꿀참외에 매혹돼 있는데 사슴인들 안 그러겠나 싶었다. 평화나눔공동체 흑인 노숙자들도 처음에는 참외에 손을 안대더니 그 맛을 알고는 참외만 찾던 일도 있었다. 세평농장에서 첫 수확으로 거둔 노랑꿀참외는 무려 200개가 넘었다. 물론 완전 무공해 작물인지라 참외 맛은 진짜 꿀맛이었다. 우리는 참외를 세미한장로교회식구들, 자원봉사자들, 평화나눔공동체 노숙자들, 그리고 얄밉지만 귀여운 사슴들과 나누어먹었다.

-세평농장에서 최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