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을 전후해 조선인이 대거 간도로 이주함에 따라 만주 선교는 불가피했고, 1908년 3월에 조직된 조선 선교연회는 이응현과 함주익 등 권서 2명과 함께 이화춘을 북간도 선교사로 용정에 파송했으니 그 때가 1908년 9월 16일의 일이었다. 이화춘은 1년간 500여명의 교인에 9개 예배당으로 성장하였고, 와룡동교회와 모아산 교회가 타원형의 두 핵처럼 든든히 서 있었다. 북간도를 찾은 원산의 하아디(Robert Hardie)로부터 힘을 얻은 이화춘은 선교사 무즈(J. R. Moose)를 닮아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 라며 조선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달래고 위로하며 소망을 불어 넣는 일에 전념했다.

1909년에 들어서서 장감연합회가 결의한 대로 간도 전역을 카나다장로회가 관장함에 따라 이화춘은 2년간 심혈을 쏟은 용정을 이기심으로 끝까지 붙들지 않고, 카나다 장로교회에 이양하고 철수함으로 협력선교를 몸소 실천했다. 이화춘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카나다장로교회를 통하여 추수하더니, 1920년에 조선 선교 연회가 정재덕목사를 파송하여 간도선교를 재개할 때 남은 열매를 거두었다.

북간도지역이 기독교 민족 운동의 본거지가 된 데는 이화춘의 손길을 부인할 수가 없다. '선구자'로 알려진 용정에는 와룡동교회와 모아산교회가 일찍이 세워졌고 이들 강단에는 이화춘이 서 있었다. 독립운동가 박무림은 이화춘의 둘도 없는 동역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 정재면, 김약연, 구춘선, 서춘, 문치정, 윤동주 등 민족 운동가를 배출한 용정에 복음을 들고 처음으로 찾아간 선교사가 이화춘이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이화춘은 1871년에 개성에서 태어나 뱃꾼 덕보의 행패로 일곱 살에 부모형제를 잃고 고아가 되더니, 어린 이화춘을 거두어 준 할머니마저 열두 살에 돌아가셨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는 외가댁에 얹혀 가게 점원 5년 경력으로 열여덟살에 패물점을 차려 보부상이 되었다. 그러나 부모의 원수 덕보를 복수하려다 살인미수로 체포되는가 하면, 보부상으로 중앙 정치에 관여했다가 실패하고, 금광에 손을 댔다가 망하는 등 검은 그림자가 그의 앞길을 막았다.

이화춘은 스물 일곱에 결혼하여 얻은 갓난 아이 티를 벗지 못하는 아들을 두고 천냥 굿을 해야 한다는 동네 무당의 말에 기구한 인생을 원망하며 화풀이할 곳만 찾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천주를 믿으면 모든 악귀가 무서워 달아난다고 권하는 방씨의 말에 귀가 번쩍 뜨여 죽음을 불사하고 천주학에 의지했다. 그 무릎 1894년 삼문출판사가 출간한 “인가귀도”를 읽고 성숙해진 이화춘으로부터 천주학으로 악귀를 쫓아낼 수 있다는 남편의 말을 들은 부인도 믿기로 작정했다.

마침 방씨를 만난 그 다음 주일 이화춘부부는 미사에 참석하였는데, 사흘 후엔가 집에서 기르던 돼지 새끼 다섯 마리와 검정개가 이유없이 거품을 토하고 죽은 후 아들 병이 깨끗이 나았으니 천주학이 만든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개성으로 집을 옮기고 금주까지 결심한 이화춘으로서는 술 마시는 신부에게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에서 발길을 돌린 이화춘은 감리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01년 세례문답에서 “당신은 거짓말을 하시오?”라고 물었던 무스 (Robert Moose)는 ‘장사를 하면서 나쁜 물건을 좋다고, 싼 물건을 비싸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하고 회개하는 이화춘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해 겨울 그는 크램(W.G. Cram) 선교사의 제안으로 복음을 파는 장사꾼이 되더니 1904년 서울 청녕교교회 전도사,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이천구역장, 1908년에는 개성남부교회 전도사로 활동하였고, 그의 선교열정을 높이 평가한 조선연회는 그를 용정 선교사로 파송하였던 것이다.

1909년 선교지를 철수하고 돌아온 이화춘은 철원구역장으로 시무하면서 1911년 협성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후에 1912년에 목사가 되었다. 그 뒤 개성남부교회목사와 금화구역장으로 사역하다가, 1924년 다시 북간도로 가서 8년 동안 사역하였으니 이화춘의 제2기 선교사역이 되겠다. 1932년 귀국하여 춘천선교를 돕던 이화춘은 1933년에 은퇴한 후에도 강릉 선교를 후원하였다.

/손상웅 목사(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