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저녁 5시쯤 세평농장을 방문했을 때였다.

암컷 말 클레식과 수컷 말 레드가 나를 보는 순간 고개를 마구 끄덕이고 있었다. 마치 반갑다는 인사치레로 머리를 꾸벅거리는 모습처럼.

그러나 말들이 그 큰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흔들 때는 매우 다급하다는 신호다. 주로 배가 고픈데 주인이 먹을거리를 주지 않을 때, 그리고 더위에 목말라 애타게 물을 달라고 주인을 부를 때 고개를 끄덕이거나 목을 빙빙 돌린다.

이런 큰 동작들 외에도 한숨을 급히 내품듯이 “푸-우-웅!” 소리를 낼 때도 있다.

레드와 클래식은 눈치가 구단쯤 된다. 보통 말들이 그렇듯 매우 예민하고 똑똑하다. 그래서 밥을 늦게 주거나 자신을 챙겨주지 않으면 잘 삐지기도 한다. 한 번 삐지면 쉽게 풀리지 않는다. 물론 나에게는 삐지거나 성난 말들을 치료하는 특별한 약이 있다. 바로 당근(캐럿)이다. 당근을 주면 삐진 말들도 나를 잘 따른다.

눈치가 빠른 클래식과 레드 앞에서는 쌍둥이를 키우듯이 언제나 먹을거리를 똑같이 나누어주어야 한다. 한 쪽만 먼저 주어도 안 된다. 언젠가 어린 레드에게 먹을 것을 먼저 주었더니 예민한 클래식이 화가 단단히 났었다.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여물통에서 먹이를 먹으려 하는 레드를 물려하자 레드가 뒷발질을 하며 싸우기도 했다.

먹는 속도도 잘 맞추어주어야 한다. 한 쪽이 먼저 먹도록 방치하면 더 달라고 난동을 부린다. 게다가 옆에서 먹고 있는 말에게 다가가 찝쩍대며 싸움을 건다. 결국 서로 싸우게 된다. 즉, 좋은 일을 했지만, 싸움질 충동죄(?)에 걸린다. 코끼리처럼 몸집이 커다란 말들이 싸울 때는 정말 무섭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언제 싸웠냐는 듯 다정하게 들판에서 풀을 먹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하지만 두 얼굴을 가진 간사한 사람들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우리가 잘 알듯 간사한 사람들은 똑같이 분배해주면 싫어한다. 상대편의 것을 더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말들은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먹을 것을 똑같이 나누어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OK!”이기 때문이다. 비록 먹는 것은 짐승같이 먹을 지라도 사람들처럼 자신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야비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고개를 마구 흔들어대는 내 말동무들(?)에게 한 통의 물을 가져다주면 단숨에 꿀꺽 들이마신다. 기린처럼 목이 긴 동물이라 물을 들이마실 때 긴 목을 통해 물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여름에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물을 다 마신다. 그리고 술에 취한 술고래들처럼 “한 통 더 가져와!” 소리를 지르며 다시 고개를 흔들어댄다. 시중을 들기 위해 다른 한 통을 갖다 바치면 그 통 역시 단숨에 비워버린다.

다행히 마구간에서 20미터만 내려가면 자연수가 흐르는 개울이 있어 맑은 물을 마음껏 공급해 줄 수 있다. 물지게가 없어 두 통을 양손으로 들어 옮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물을 갖다 주면 시원스럽게 단숨에 마시는 우리 말동무들이 예뻐서 힘든 것도 잊는다.

내가 우리 말동무들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레드와 클래식은 내가 물통만 들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말동무들은 내가 어디서 물을 길어오는지도 잘 안다. 개울에 내려가 물을 길어 올 때면, 어느새 담장 너머로 목을 길게 내민 채 물을 받아 마실 준비를 하고는 빨리 오라고 머리를 흔들어댄다.

늘 한 두 통의 물을 예비해 놓지만 오늘은 레드가 매우 목이 말랐는지 오늘 준 두 통을 다 마시고도 물을 더 달라고 “푸-우-웅!”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미 클래식은 목마름을 씻고는 건초더미가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레드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레드를 보며 말했다.

“레드야, 목마르니? 잠시만 기다려라. 물을 한 통 더 길러오마.”

한 말 당 늘 두 통의 물이면 족하다고 생각했기에 개울에 내려가 주변을 청소하다가 그만 목마른 레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 클래식을 따라 건초를 먹으러 갔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물을 길어 개울둑을 넘어서고 있을 때였다. 레드는 마굿간 담장너머에서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드는 나를 보더니 큰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담장으로 다가서자 레드는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듯이 코를 킁킁거리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든 물통을 빨리 내려놓으라.”며 고개를 또 한 번 흔들어댔다. 물 한 통을 단숨에 들이 마시는 예쁜 레드를 보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목마름에 애타게 물을 기다리던 레드를 보며 평화나눔공동체가 돌보고 있는 워싱턴디씨 빈민거리의 노숙자들을 생각해 보았다. 한 여름에 타는 목마름을 참지 못해 입을 벌린 채 잔디밭에 쓰러져 있는 노숙자들. 한 병의 생수도 도움 받을 수 없어 공원 쓰레기통을 뒤지며 누군가가 마시다 버린 음료수를 마시는 노숙자들. 물을 찾아 머리를 흔드는 레드나 목마름을 씻기 위해 1불을 달라며 손짓을 하는 노숙자들. 이들은 잠시라도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도움의 대상들이다.

나의 가족이 음료수를 달라면 당장 가게에 가서 한 박스의 음료수를 사와 집을 채우지 않았는가. 레드처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이 우리들의 가정이나 교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인가.

나는 레드와 클래식을 매우 사랑한다. 이들은 농장 주인들로부터 버려진 노숙자 말들이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딘가에 문제가 있어 버려진 말들이다. 대부분 경주용 말들이 정상적인 기능을 못할 때 주인들로부터 버려지곤 한다. 노숙자선교를 하다 보니 평화나눔공동체 세평농장에도 노숙자 동물들이 많이 있다.

오늘은 레드를 보며 주님께서 하신 마태복음10장42절 말씀을 묵상해 본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세평농장에서 최상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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