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양국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을 통일하여 통일왕국의 첫번째 왕으로 삼은 다윗에게는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압살롬은 다윗과 아가야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아들이다(대상 3:2) 그는 당대에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잡을 것이 없는 아름다움으로 칭찬받는 사람(삼하 14:25)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압살롬은 누이 다말이 이복형제 암논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알고 암논을 살해하고 다윗의 눈을 피해 외가에서 3년간을 숨어 지낼만큼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이후 다윗의 누이인 수루야의 아들 군대장관 요압의 중재로 다윗과 화해를 했지만 압살롬의 마음속에는 다윗의 왕위가 탐이 났고 부러울것 없는 왕궁 생활에서도 흑심을 품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역을 도모한다.
압살롬은 이후의 반역을 합리화 하고 백성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송사나 재판하는 곳이 있으면 직접 나가 그 사람들을 붙들고 입을 맞추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환심을 산다.(삼하 15:6)
반역을 조용히 준비하며 다윗의 신하들을 포섭한 압살롬은 4년이 지난 후에 헤브론에서 군대를 모으고 이스라엘에서 모사(謀士)꾼, 즉 책사(策士)로 칭송받는 다윗의 신하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삼아 제사를 빌미로 대관식(戴冠式)을 치르게 된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반역을 도모하기 위해 다윗이 머물고 있는 이스라엘의 왕궁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접한 다윗은 후궁 10명만 왕궁에 남겨둔 채 유다광야로 도망을 하게 된다. 이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시편 64편과 63편이다.
예루살렘의 왕궁을 찬탈(簒奪)한 압살롬은 신하들로 하여 백주 대낮에 후궁들을 겁탈하고 아히도벨과 함께 다윗을 추격한다. 하나님과 함께한 다윗을 죽이지 못하게 되자 아히도벨은 스스로의 죄를 대신하여 고향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목매어 죽고, 요단을 건너 다윗을 추격하던 압살롬과 이스라엘 군대는 길르앗 땅에 진을 치게 된다. 때에 마하나임에 머물던 다윗은 군대를 재정비하게 이른다.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워 군대를 세운 다윗은 요압과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와 가드사람 잇대와 함께 셋으로 군대를 나눠 압살롬과 이스라엘 군대를 치니 그날에 죽은 수가 이만명이 되고,(삼하 18:7) 패한 압살롬은 다윗왕에 의해 도망자가 되었다.
도망자(逃亡者)신세가 된 배신자(背信者)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하다 상수리나무 가지에 머리가 걸렸고, 이를 본 사람이 요압에게 고하여 요압이 압살롬을 해(害)하지 말라는 다윗의 명을 어기고 작은 창 셋으로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명이 압살롬을 쳐죽인다.(삼하 18:14) 배신자(背信者)의 말로는 죽음으로 끝났고 다윗왕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배신을 할 때 그 아픔이 크고, 큰 상처로 남게 된다. 하나님을 가장 많이 알고 있어야 되고, 하나님을 가장 많이 증거 해야 할, 성도(聖徒)된 우리들이 날마다 돈(Money)과 명예(Honor)와 권력(Power)을 위해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음은 숨기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배신(背信)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고, 바른길로 인도 해 주시기 위해 보혜사 성령으로 인도 받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들의 자의지로 이를 거부하며 하나님을 배신(背信)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육체를 위한 돈(Money)과 명예(Honor)와 권력(Power)을 위하여 따라가면 성령과 거스림이 있고, 성령의 거스림이 있다는 것은 결국 이 모든 것을 취하지 못하게 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오늘도 수고하며, 달려가고 있다. 이는 배신(背信)함으로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아히도벨과 압살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뒷 담화를 하면서 즐거움을 삼고 촌철살인(寸鐵殺人=손가락 한마디의 칼로 살인한다는 뜻으로 세치의 혀로 상대방을 죽이는 말을 일컬어 쓰이는 단어다)을 저지르는 우리들의 일상가운데 나는 오늘도 배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뒤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는 겸손하고, 다정하고, 거룩하다가 상대가 없는 자리에서 촌철살인(寸鐵殺人)을 저지르는 우를 범하므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람을 배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도 나를 돌아보기를 청합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데 걸림돌이 되거나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을 실족케 만든다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눅 17:2)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나를 내어 놓고 하나님의 치리하심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을 배신(背信)하여 영적인 죽음의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의길로 가기 위해서는 두 마음을 갖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지켜 행함으로 생업과 가정, 그리고 자신이 은혜가운데 거하여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참 기쁨을 맛보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압살롬은 누이 다말이 이복형제 암논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알고 암논을 살해하고 다윗의 눈을 피해 외가에서 3년간을 숨어 지낼만큼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이후 다윗의 누이인 수루야의 아들 군대장관 요압의 중재로 다윗과 화해를 했지만 압살롬의 마음속에는 다윗의 왕위가 탐이 났고 부러울것 없는 왕궁 생활에서도 흑심을 품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역을 도모한다.
압살롬은 이후의 반역을 합리화 하고 백성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송사나 재판하는 곳이 있으면 직접 나가 그 사람들을 붙들고 입을 맞추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환심을 산다.(삼하 15:6)
반역을 조용히 준비하며 다윗의 신하들을 포섭한 압살롬은 4년이 지난 후에 헤브론에서 군대를 모으고 이스라엘에서 모사(謀士)꾼, 즉 책사(策士)로 칭송받는 다윗의 신하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삼아 제사를 빌미로 대관식(戴冠式)을 치르게 된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반역을 도모하기 위해 다윗이 머물고 있는 이스라엘의 왕궁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접한 다윗은 후궁 10명만 왕궁에 남겨둔 채 유다광야로 도망을 하게 된다. 이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시편 64편과 63편이다.
예루살렘의 왕궁을 찬탈(簒奪)한 압살롬은 신하들로 하여 백주 대낮에 후궁들을 겁탈하고 아히도벨과 함께 다윗을 추격한다. 하나님과 함께한 다윗을 죽이지 못하게 되자 아히도벨은 스스로의 죄를 대신하여 고향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목매어 죽고, 요단을 건너 다윗을 추격하던 압살롬과 이스라엘 군대는 길르앗 땅에 진을 치게 된다. 때에 마하나임에 머물던 다윗은 군대를 재정비하게 이른다.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워 군대를 세운 다윗은 요압과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와 가드사람 잇대와 함께 셋으로 군대를 나눠 압살롬과 이스라엘 군대를 치니 그날에 죽은 수가 이만명이 되고,(삼하 18:7) 패한 압살롬은 다윗왕에 의해 도망자가 되었다.
도망자(逃亡者)신세가 된 배신자(背信者)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하다 상수리나무 가지에 머리가 걸렸고, 이를 본 사람이 요압에게 고하여 요압이 압살롬을 해(害)하지 말라는 다윗의 명을 어기고 작은 창 셋으로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명이 압살롬을 쳐죽인다.(삼하 18:14) 배신자(背信者)의 말로는 죽음으로 끝났고 다윗왕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배신을 할 때 그 아픔이 크고, 큰 상처로 남게 된다. 하나님을 가장 많이 알고 있어야 되고, 하나님을 가장 많이 증거 해야 할, 성도(聖徒)된 우리들이 날마다 돈(Money)과 명예(Honor)와 권력(Power)을 위해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음은 숨기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배신(背信)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고, 바른길로 인도 해 주시기 위해 보혜사 성령으로 인도 받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들의 자의지로 이를 거부하며 하나님을 배신(背信)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육체를 위한 돈(Money)과 명예(Honor)와 권력(Power)을 위하여 따라가면 성령과 거스림이 있고, 성령의 거스림이 있다는 것은 결국 이 모든 것을 취하지 못하게 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오늘도 수고하며, 달려가고 있다. 이는 배신(背信)함으로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아히도벨과 압살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뒷 담화를 하면서 즐거움을 삼고 촌철살인(寸鐵殺人=손가락 한마디의 칼로 살인한다는 뜻으로 세치의 혀로 상대방을 죽이는 말을 일컬어 쓰이는 단어다)을 저지르는 우리들의 일상가운데 나는 오늘도 배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뒤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는 겸손하고, 다정하고, 거룩하다가 상대가 없는 자리에서 촌철살인(寸鐵殺人)을 저지르는 우를 범하므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람을 배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도 나를 돌아보기를 청합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데 걸림돌이 되거나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을 실족케 만든다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눅 17:2)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나를 내어 놓고 하나님의 치리하심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을 배신(背信)하여 영적인 죽음의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의길로 가기 위해서는 두 마음을 갖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지켜 행함으로 생업과 가정, 그리고 자신이 은혜가운데 거하여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참 기쁨을 맛보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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