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시온장로교회를 개척해 24년간 시무했던 이순각 목사가 오는 10월 26일 은퇴예배를 드린 후 페루선교사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목회자가 먼저 본을 보여야

이 목사가 개척할 당시만 해도 성도들 대부분이 세탁소나 캐리 아웃에서 일을 많이 했다. 이민 와서 가정과 교회, 직장생활이 다 불안한 그들이 빨리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왔으며 심방도 가장 더운 날 하면서 그들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려고 노력했다.

1년에 한 두 번은 기도원에 가서 목회서신을 계속해서 읽었다. 이런 시간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목회자 상,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회자의 모습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목사는 “성경공부로 시작하지만 생활에서 결론이 나야 한다. 가르치는 것은 쉽다. 대학교수는 지식만 잘 전달하면 된다. 목사는 지식도 잘 전해야 하지만 생활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된다. 목회자가 먼저 앞장서야 한다.”면서 “성도들이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목회자가 먼저 본을 보일 것”을 강조했다.

본교회 건축 대신 선교지에 3개의 교회 세워

이 목사는 선교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설립 2년 만에 전북 무주 청량리에 농촌 주민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해 주었으며, 1989년에는 페루 수도인 리마 외곽에 교회를 지어줬다. 알마타 지역에도 재정뿐만 아니라 교회 건축을 위한 모금 아이디어 및 전략을 제공해 40만불 상당의 교회가 완공되게 했다.

하지만 정작 시온장로교회는 부지만 사놓고 건축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목사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미국 감리교회가 새로 건축을 해서 나가는 바람에 그 건물을 3년째 단독건물로 사용하고 있다.”면서 감사해 했다.

은퇴 후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이순각 목사

이순각 목사는 은퇴 이후의 새로운 인생을 꿈꾸고 있다. 벌써부터 기도 후원자를 찾는 등 페루 청년들을 위한 사역을 하나하나 준비하고 있다.

이 목사는 아버지가 평양신학대를 다닐 때 태어났으며 6.25전쟁 때 남으로 내려왔다. 호남지역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목사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한남대학교 성문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장로회 신학대학에 입학한 후 서울 문화교회 교육 전도사로 부임했다. 이 때부터 이 목사의 청년들에 대한 사랑은 시작됐다. 졸업 후 서울 동숭교회에 부임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쯤에는 청년들을 위한 것이라면 물불을 안 가릴 정도로 뜨거웠다고 한다. 1970년대 초반인 당시 벌서 연극, 워십댄스, 밴드 등을 했을 정도니 말이다. 얼마 전 ‘빈방없습니까’라는 연극으로 미국을 찾은 팀도 동숭교회 출신이라고 한다.

1975년 도미 후 매디슨 한인교회, 시카고 영광교회에서 사역할 때도 청소년 사역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1982년 워싱톤 영락교회에 부임하고 1984년 워싱턴 시온 장로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열정만 있었지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전 한국에 다녀 온 후 다시금 청년 사역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됐다. 4개월의 한국 방문 기간 동안 청소년 시절 이 목사의 영향을 받아 목회자가 됐거나 선교사로 나간 20여명의 귀한 열매들을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 열매들을 보면서 이 목사는 “역시 젊은이들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3년 전 페루에서 사역하고 있는 처남 황윤일 선교사가 털어놓은 고충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황 선교사는 한국선교사로는 제일 먼저 페루에 들어간 선교사로 21년째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3년 전에는 연세대에서 20년 이상 선교지에서 희생과 헌신으로 모범이 된 선교사에게 수여하는 ‘언더우드상’을 받았고, 후지모리 수상이 재임할 때는 페루 정부로부터 감사장을 받을 정도로 신뢰를 받는 선교사다.

황 선교사가 뿌깔빠에서 사역하는 동안 열악한 자녀교육 환경으로 인해 시작한 유치원이 매년 발전해 현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세워지게 됐다. 이 호산나학교는 현재 학생수만 600명이 넘으며 정식 유급 직원이 70명이 넘는다. 금년에는 이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이 처음으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게 됐다. 졸업한 아이들은 대부분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대학을 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남미의 천주교는 거의 타락 수준이고 사회적으로도 건전하지 못한 문화가 팽배한 수도 리마에 이들을 안심하고 맡길 교육기관이 없다는 것이다.

황 선교사의 이런 고민을 이 목사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예비하신 길”로 들었다. 이 목사는 “현재 내 인생은 아궁이 밖에 나와있어 아직 타지 못한 장작과 같은 인생이다. 이제는 그 장작을 손으로 밀어 넣어 활활 태울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현재 호산나 학교를 졸업해 리마에 있는 청년들은 약 40여명이며 이 목사 부부는 이들에게 영적인 양식과 육적인 양식을 지속적으로 채워줄 수 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 목사는 “아직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먼저 기도를 시작했고 앞으로 기도 후원자, 재정 후원자들을 놓고 기도할 예정이다. 학기가 시작되는 내년 3월 이전에는 페루로 들어갈 수 있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황정자 사모는 “동생인 황 선교사의 비전은 호산나 학교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세운 연세대, 이화여대, 종합병원처럼 발전해 페루를 이끌 지도자들을 배출해 내는 것이다.”라며 “다시 젊은이로 돌아가는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