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여 미워하는 감정을 두고 흔히들 "질투"(Jealousy)라고 한다. 그 도가 지나치면 심한 증오나 적대감을 품는 경우도 많다. 가장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는 심한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는 관계의 경우에서 비롯된다고 볼 것이다. 가령, 형제 또는 자매 사이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경우에 언제나 이 질투의 현상이 쉽사리 발견되고는 한다. 뿐만 아니라, 또 누구든지 자기의 것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와 걱정이 생겨서 경쟁 상대를 미워하고 원망하게 될 때에 이 질투 현상은 더욱 더 쉽사리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정신심리학자요, 정신과 의사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질투의 감정은 특별히 유아기 시절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가령, 여자아이가 “남근선망”(男根羨望)의 감정을 이 무렵에 갖는 것도 일종의 남성에 대한 질투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억압된 질투는 결국 무의식적인 것이 되어서 자기가 무능하다고 여겨질 경우에 더욱 심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부부 사이에서의 질투는 그래서 결국 자신이 누군가 경쟁상대에 대한 열등의식(컴플렉스)이나 불성실에 대한 변명일 수가 있다는 게다. 소위 “투사”(投射)된 질투라고 하는데 이런 종류의 질투가 심한 경우에는 일종의 망상장애인 “의처증과 의부증”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상습적으로 배우자의 가상 불륜 사실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고자 압박하거나, 의심과 폭력적 행동으로 표출되는 이 의처증 또는 의부증 역시도 결국 그 근본 원인은 바로 이 질투에서 시작된다는 게다.

그런데 목회자들의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질투가 가능할 수 있다고 단정하며 논지를 펼쳐 놓은 한 편의 칼럼을 읽었던 적이 있다. 비록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고, 또 한 번도 얼굴을 직접 마주해 본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참으로 숙고할 만한 내용의 글을 미주 교계신문에 실어 놓았던 이가 있었다. 그는 텍사스에 소재한 남감리교 대학교(SMU)에서 조직신학으로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한 바 있고, 비교적 오랫동안 이 미국에 남아서, 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던 이다. 지금은 역사와 전통이 깊은 인천 내리 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를 하고 있는 생각이 깊은 목사, 그 이름은 김흥규 목사다. 바로 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신문에 올려놓았던 적이 있다. 인용부호 없이 가급적 전문 그대로를 여기 옮겨놓아 본다.

흑자는 목회자가 인기를 주 무대로 하는 “무대인”(Stage Man)이라고 풍자한다. 그래서 다른 인기 직업인들과 마찬가지로 질투심이 강하다는 것이다. 남이 나보다 설교를 더 잘하면 샘이 나고, 남이 나보다 목회를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면 질투심이 발동한다는 것이다. 큰 교회의 목사가 병이 나서 쓰러졌다거나 어떤 스캔들에 연루되어서 곤혹을 치른다고 하면, 겉으로는 그저 동정하는 척도 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사실 고소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목회자 역시 인간이니 이런 질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목회자의 질투심은 인사 문제에 있어서 더 많이 나타난다. 제법 큰 교회에 자리가 나서 자기가 아닌 다른 아무개가 후보로 거론된다고 할 때, 특히 자신이 잘 아는 같은 연배이거나 아는 선배일수록 깎아 내리는 경우가 더 왕성하다. 까마득한 후배일 경우에는 체면 때문에 내놓고 헐뜯지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연배의 차이가 없는 선배이거나 엇비슷한 동년배일 때는 은근한 시기심을 품고 더 흠집을 내려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이웃 교회나 같은 지역 내의 한 교회가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을 때에도 이 또한 질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결국 그런 질투심은 상대방을 헤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옥죄기 때문에 반드시 넘어서야만 한다.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질투심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째로,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설교 잘하는 은사를 주신 것이 아니며, 다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은사를 주신 것도 아니다. 또한 다 큰 교회를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을 주신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주권에 겸손히 순복할 때만이 이 질투심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오늘의 삶 저 너머 죽음과 허무와 영원을 볼 수 있는 영성을 기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진상을 확연히 깨쳐 영적 진보를 이룬다면 열등감이나 우월감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일체의 물상이 점점 작아지듯이, 영원의 빛에서 오늘을 바라본다면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느냐의 싸움은 한 마디로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 사는 우리 목회자들은 알베르 까뮈가 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까를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에 대하여 용서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당신이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목회자로서 한 번쯤은 꼭 곱씹어 볼 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도 질투로 인하여 안타깝게 끝난 이야기들이 참 많다. 벌써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그랬고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부터가 그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질투는 결국 자기 자신의 불행과 어두운 그림자만을 남기고 말았다는 사실들이다. 그럼에도 만일, 프로이트의 말대로 “질투”가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잘 다스리거나,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김흥규 목사는 그 대안적 방법으로 “은사의 활용과 영적인 성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나름의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누구든지 무력감보다는 자기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당당히 자기 “나름”의 목표와 삶을 최대한 키우고 꾸려 나가자는 게다.

질투 속에는 언제나 강한 자존심이 중심에 서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이기고 비교하는데 그 자존심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것”의 소중함을 더욱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알고, 자기 “나름”의 목표와 삶을 더욱 값있고 보람되게 키우며 꾸려 나가는데 그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선 “나”라는 존재가 과연 누구이며,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아는 정체성(Identity)의 확립이 가장 먼저 필요할 게다. 그러므로 진정한 삶의 지혜는 누구에게든지 진정 "질투"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성실함"의 소유가 아닌가 가만히 숙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