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대선후보인 바락 오바마(Barack Obama)가 고향인 이곳 하와이를 방문하고 있을 때, 저 동구 유럽에서는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상대도 안 되는 조족지혈(鳥足之血)의 한 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전쟁은 이미 승부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는 싸움이었다. 고대 수학자요 철학자인 피타고라스가 이미 예고한대로 “장차 시대의 지배적인 신은 숫자의 신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 새삼스러울 따름이었다. 장래에는 더 많은 숫자의 군대, 더 많은 숫자의 무기, 또 더 많은 숫자의 황금을 소유한 나라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던 피타고라스의 예견이 다시 한 번 예증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성경을 들여다보면 이 피타고라스의 논리에 대한 역설(Paradox)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구약성경 사사기(Judges)에 등장하는 기드온의 300군사 이야기가 자명한 논증이다. 아직 왕정(王政)이 등장하기 전인 이스라엘이 이웃나라 강대국 미디안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런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 속에서, 사사 기드온은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의병들을 모집하였다. 그랬더니 3만 2천명의 군사들이 자원하였다. 그런데 그가 신앙하던 하나님이 그에게 숫자가 너무 많다고 좀 돌려보내라고 말씀했던 게다. 사실, 이 숫자도 지극히 부족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던 터에, 돌려보내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게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전쟁에 임할 준비가 안 된 사람들 2만 2천명은 돌려보냈다. 그래서 이제 만 명만 남았다. 그런데 또 “야! 만 명도 아직 너무 많다. 좀 더 돌려보내!” 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들었다. 결국 순종함으로 다수를 다시 돌려보낸 결과, 이제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겨우 300명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하나님은 이 최후의 300명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고, 또 사사 기드온을 통해 한 나라를 지키고 세우는 일을 하셨다는 게다.

그런데 굳이 이런 소수의 군사들을 통해서만 굳이 전쟁에 임하여야만 될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그렇다. 성경은 그것을 아주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사사기 7장 2절을 들여다보면, “이는 이스라엘이 나[여호와]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고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긍”치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게다. “자긍”은 “자랑” 또는 “교만”이라는 의미와 동류의 단어다.

여기서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오직 300명 소수의 정병으로만 기드온으로 하여금 전쟁에 임하게 한 이유는 그들로 인하여 자긍치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다는 게다. 다시 말하면, 많은 숫자의 군사로 전쟁에서 그들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기를 그 많은 숫자의 군대가 있었기에 자신들이 승리를 거두고 나라를 구할 수 있었노라고 생각했을 거란 말이다. 그런데 당시 300명이라는 숫자는 절대로 전쟁에서 승산이 불가능한 작은 숫자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그들이 그 작은 숫자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했더니 승리했다는 게다. 그 승리의 원인은 결코 사람의 숫자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메시지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는 틀림없이 교만이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성경은 이 교만함에 대해서 대단히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즉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신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어려운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삶의 터전 가운데 우리의 연약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들을 이제는 좀 깨달을 수 있을 듯싶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아직 우리에게 그대로 드러나는 그 수많은 연약함의 까닭이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도, 아직 우리의 연약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 그것도 오랜 세월을 남겨두는 이유, 그것은 우리를 “교만치 않게 하시려는” 이유 때문인 게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은 그야말로 영적 거인이었다. 당시 세계를 네 바퀴씩이나 돌면서 온 세계를 복음으로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던 사람이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기도를 하면 사람들이 치료를 받았고, 또 그가 들어가는 도시마다 마을마다, 복음의 역사로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나기만 했다. 그런데 그런 바울조차도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던 어려움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 안에 담고 사는 육체의 질병이었다. 그는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다. 자신을 계속해서 찌르고 있는 가시, “나를 괴롭히고 나를 아프게 하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육체의 가시”라고.

그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제발 이 병 좀 고쳐 주십시오”라고 결사적으로 기도하였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낫지를 않았다.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자고치 않게 하시려고” 가시를 주셨다는 게다. 다시 말해 “교만치 않게 하시려고.”

그렇다. “우리”라는 모든 인간들이 제아무리 똑똑하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인생을 사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재물이 좀 있다고 해서, 또 그것만 가지고 인생을 사는 것도 절대 아닐 것이다. 이유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우리가 과연 가져야 얼마를 가졌고, 또 알아야 얼마를 알고 있다고 자신하겠나?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알고 “자고치 않게 하시려고” 모든 연약함을 그저 바라보고만 계시다는 게다. 짧은 인생, 살아가면서 자고치 말자. 스스로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우리가 되자. 그런 겸허한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정녕 우리를 축복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