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터커가 지은 책 "예루살렘에서부터 이리아 자야까지"라는 책을 읽고 제 마음을 흔든 하나님이 사랑하신 선교사,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선교사 다섯분의 간략한 삶과 사역, 그리고 선교전략을 칼럼으로 옮겼습니다.

1. 윌리엄 캐머론 타운센드(William Cameron Tawnsend)

20세기 성경번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이가 WBT / SIL 의 설립자 윌리암 캐머룬 타운센드다. 1982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미국 세계선교센타(United States Center for World Mission)의 랄프 윈터(Ralph Winter)는 윌리암 케리, 허드슨 테일러와 견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3인 선교사 중 한사람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1917년 성경을 판매하러 중미 과테말라로 떠났던 캐머룬은 칵치켈(Cakchiquel) 인디안의 의미심장한 질문을 받는다.

“당신이 전하는 하나님이 그렇게 똑똑하다면 어떻게 우리말을 모르는가?”

스페인어를 모르는 20만 이상의 인디안들에겐 스페인어 성경이 무용지물인 것을 몰랐다. 돌발적인 질문에 당황한 캐머룬은 그 후 13년간 칵치켈 인디안 언어를 연구에 몰두했고, 드디어 신약성경을 번역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명해 보였다.

이것은 캐머룬으로 하여금 아직 지구상 오대양 육대주에 산재하고 있는 24,000여 people group에 6,800개의 언어 중 아직도 문자화 되지 않은 미전도 족속의 언어에 깊은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었다. 캐머룬 타운센드는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와 섬머언어학연구소를 설립하고 번역사역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다.

동료선교사와, 다른 종교단체의 비난과 비판이 강하고 분란의 소지가 많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원자로 믿는 일에 기여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번역한 성경을 누가 사용하더라도 우리는 기쁘게 여길 것이다”

성격이 원만하여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고 동료들과도 화목하며 관용했던 그는 번역사역을 위해서라면 정부 당국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단체, 심지어 캐톨릭과 협력하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원자로 전하는 일에 누구와도 협력하길 즐겨했다.

캐머룬 타운센드를 통해 배우는 선교 전략
1) 캐머룬의 특징적 성품은 관용이다.
2)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는 그 누구와도, 어떤 종교, 어떤 인종이든지 받아들이는 포용적인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3) 그런 믿음과 정책은 유색인종도 적극적으로 일꾼으로 받아들여 번역선교에 참여하도록 했다.
4) 일부 명석한 두뇌집단과, 유명 대학 출신의 Ph.D, 고급 두뇌만을 선호하지 않았고, 피선교지에 선교사로서 줄 수 있는 최고 최대 최장 영향력 있는 선물인 성경을 자국 방언으로 번역하여 들려 줄 수 있다면 학위 불문하고 누구든지 번역선교회에 유치했다.
5) 선교회를 자기 임으로 좌지우지하지 않고, 실행위원회 권위와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겸손을 본으로 보인 선교사였다.
6) 보수 좋고 장래가 보장된 직장을 쫓지 않고 멕시코의 MK를 위해 교사로 자원하한 신실한 아내 엘리안의 내조가 분명했다.
7) 50년간 선교현장에서 혼신을 다해 정열적으로 선교를 감당했다.

(결론)
생물학적 나이 72세는 건강과 창의력이 떨어지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노구의 어려움과, 뒤 늦게 공부하는 부담을 떨쳐내고 러시아 각 지방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집념 어린 열정이 귀감이 된다.

코카서스 지방으로 내려가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전설을 듣고, 언어 채집을 하여 러시아 각 지방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그의 노익장을 보면 감동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선교사가 현지에서 현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자국언어로 기록된 성경임을 알고 성경 번역에 일생을 헌신한 그의 열심은 분명 특별하다.

캐머룬이 성경번역에 일생을 투신한 것은 성경에 대한 확신과 믿음 때문이었다.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선교지 원주민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이다. 성경은 선교사들처럼 안식년도 필요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 받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아직 번역을 기다리는 3,000 언어가 복음에 빚진 자 같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제 바톤을 쥔 우리가 뛸 차례다.

2. 존 모트(John R. Mott)

아이오(Iwoa)와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난 존 모트, 코넬 대학교에서 스터드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영적 성장과 전도를 최우선시하게 되었다. 메사추세츠 헐먼산에서 있었던 기독학생수련회에서 은혜를 받고 프린스턴 서약에 서명한 후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가겠다고 헌신했다.

이것이 대학생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1888)의 입회서약이었다. SVM의 창립회원과 지도자로서 모트는 “세계 복음화는 우리 세대에”라는 구호를 액면 그대로 실현하려고 애썼다. YMCA 에서 40년간 활동하면서 16년간은 총무로 훌륭히 일했다.

존 모트를 통해 배우는 선교전략
1) 그가 주창하여 1910년에 열린 에딘버러 선교회의(Edinburgh Missionary Conference). 1335명의 초교파적인 국제 선교사연합회 대표가 참석하여 10일간 계속된 회의는 그 후 교회연합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2) 미션 스테이트먼트와 단계별 성장 그림을 그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꿈을 꾸는 Dream Builder였다. 1910년 당시 45,000명의 선교사가 30년 후엔 3배가 넘는 선교사들이 전세계 오대양 육대주에서 사역할 것을 예견하고, 꿈의 실현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3) 모트는 세계복음화에서 줄곧 사회적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회봉사는 우리세대에 가장 분명한 사명이라고 도전 하였다.
4) 선교사역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5) 비기독교인을 개종시키는 것이 선교의 첫번째 목적이라고 했다. 말년까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설립을 위해 애썼다.
6)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하는 공인이었지만 가정도 잘 돌본 모범 가장이었다

3. 헬렌 로즈비어(Helen Roseveare)

높은 지성과 능력을 갖춘 아프리카 콩고 의료 선교사 헬렌 로즈비어. 1925년 영국의 지체높고 존경받던 콘월 가문에서 출생. 캠브리지에서 의학 공부. 1953년 복음사역을 강조하고 의료 봉사를 보조적인 수단으로 인정하는 세계 복음화 십자군(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WEC) 의 선교사가 되어 콩고로 건너갔다. 이밤비에 병원 겸 의료 훈련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20년간 열정적인 사역을 벌인다.

헬렌 로즈비어를 통해 배우는 선교 전략들

1) 가르치는 것을 사랑하여 열심히 제자삼고 훈련하였다.
2) 함께 일하는 흑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social life time 을 보냈다.
3)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피선교지의 사람들과 동화를 잘 했다.
4) 여성 선교사로서 치명적일 수 있는 반군에 의해 강간을 당하고서도 꿋꿋이 선교현장을 믿음으로 지킨 복음의 여전사. 심바 반군이 강도로 돌변해 독살하려고 했지만 모면할 수 있었고, 잔인한 폭력이 흑인 민족주의의 미명하에 저질러 졌고, 5개월간 억류되기도 했다. 반군이 선교사 촌을 점령하여 헬렌을 무지막지하게 때리고 강간을 당했으나 용서하였다.
5) 상처받은 치유자로, 자신과 같은 폭행을 당한 여인들과 그 땅의 사람들을 위해 더욱 헌신한 사역자다.
6) 강간이라는 엄청난 일을 당하고도 하나님을 저버리거나 영적인 순수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정결한 경건을 늘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7) 선교 강연과 저술을 통해 검은 대륙 아프리카가 주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을 호소하는 전문성을 보였다.

4. 메리 슬래서(Mary Slesser)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과 선교사역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어 수십명의 선교사들이 아프리카로 떠났는데 여기에는 여성들도 포함되었다. 메리 슬래서는 맨발에다가 옷은 대충 입고 빨강 머리를 가졌으며 억척스럽게 일하는 여자였다. 아프리카식으로 지은 움막에서 살았고, 얼굴에 종기가 생겨 진물이 흘러 내려도 개의치 않았다. 의치가 없어 볼이 홀쭉 들어가기도 했다.

1875년 캘러바 선교회에 지원한 메리는, 1876년 26세의 나이로 서 아프리카 나이제리아(Nigeria) 캘러바(Calabar) 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위대한 아프리카 여성사역자로 귀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메리 슬레서를 통해 배우는 선교전략
1) 가난하고 역기능적인 가정배경에서 겪은 아픔과 상처가 도리어 선교지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돕는데 귀한 토양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2) 더러운 빈민가에서 경험했던 선교 사역은 아프리카 오지에서의 개척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선교자원이 되었다. 아프리카 듀크 타운에서의 처음 3년간의 생활은 말라리아와 홈시크니스를 겪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3) 영적 전투가 치열한 아프리카 현지에서 삼위 일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능력 대결을 서슴치 않고 감행하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4) 마술과 주술이 성행하고, 쌍둥이를 잔인하게 죽이는 잔인한 풍습을 철폐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전도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5) 선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머뭇거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선교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프리카를 향한 일편단심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6) 부족간 분쟁 해결, 학교 설립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기술을 가르쳐 교역할 수 있는 통로 마련, 후배 선교사들이 사역할 수 있는 길과 무대를 마련한 피스 메이커였다.

(결론)
메리는 아프리카 내륙 오지, 백인 선교사들 몇몇이 이미 죽임을 당한 곳, 위협적인 미지의 부족이 살고 있던 오코용(Okoyong)으로 들어가 25년간 사역하며 부족간 분쟁을 해결하고, 학교를 설립하고, 기술을 가르치며 교역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여 동료, 후배 선교사들이 사역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후, 이투(Itu) 지역으로 옮겨 사역을 확장 시켰고, 66세의 나이에 움막집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과감, 용감, 개척정신에 불탄 열심, 아프리카 현지 부족들과 격의 없이 어울릴 만큼 소탈하고 검소하고, 불의, 미신, 주술적인 영적 싸움에도 담대하여 쌍둥이를 죽이는 관습을 철폐하고 복음을 전하는 길을 닦고 열었다. 원주민 부족과 같은 움막집에서 살고, 그들처럼 입고, 먹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동화하며 살았다.

5. 봅 피어스와 선명회(Bob Pierce and World Wision)

예수님의 본을 따라 기독교의 본질인 박애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사람들의 육적 필요를 먼저 채워주고, 그런 다음에 인간의 참된 영적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일에 나도 마음 아파하자” 그는 실로 불쌍한 이웃의 친구였다.

봅은 1914년 아이오와 포트 도지(Fort Dodge)에서 7자녀 중 막내로 출생. 파사데나 나사렛 칼리지에서 공부했고, 후에 십대선교회(YFC, Youth for Christ)사역에 합류하여 청소년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봅이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해 헌신하게 된 것은 중국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이다. 고아원 정원의 4배를 초과한 열악한 환경에서 감기를 앓으며 뼈만 앙상한채 버려진 여아를 품에 안은 봅은 기독교 자선 사업에 자신의 모든 힘을 바치게 되었다.

1950년 전쟁이 한바탕 휩쓸고 간 한국, 불쌍한 전쟁 고아들을 보고 국제 선명회(World vision International)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구제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음식과 의복과 약을 제공했다.

2,0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돌보며 시작한 것이 몇 년 후에는 100배 이상 수가 늘었다. 극동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디든 환란을 당한 이웃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달려가서 고아원, 병원, 복음전도 집회소 등을 건축하며 실제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선명회를 나와 사마리아인 봉사회(Samaritan’s Purse)를 설립해 아시아의 선교사들을 후원했다.

봅 피어스와 선명회를 통해서 얻는 선교전략

1) 눈부신 구제와 선교가 이뤄지도록 후원하면서도 공을 다른 단체에게 돌리고 겸손히 뒤에 숨는 성숙한 구제와 선교 정책을 구사했다.
2) 수백개의 학교, 고아원, 모자원, 진료소, 병원, 기숙사, 교회건물 등이 선명회 후원을 통해 설립 되었지만, 대부분이 해외선교 단체, 현지교회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3) 제 3세계 기독교인의 많은 협력과 참여에 인색하지 않았다. 인도인 사무엘 카말슨은 부총무로 선명회 사역을 극대화 시켰고, 많은 저술을 통하여 영향력을 끼쳤다.
4) 구원받은 크리스챤이 믿음위에 실제적인 행함을 권장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제와 전도와 선교에 동참하도록 했다

선명회는 당장 한끼니를 때울 수 있는 빵을 주기보다는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아프리카 원주민 말에는 배고픈 사람은 들을 귀가 없다고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함으로 사랑을 실천 해야 한다

(결론)
카레룬 타운센드를 통해서 피선교지 현지인들에게 난곳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여 복음을 들을 수 있게하는 거룩한 헌신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교 열정을 배운다

존 모트를 통해서 세계선교와 사회봉사의 중요성을 도전받았다. 가정도 소중히 여기면서 가루 서말에 누룩이 온통 가득히 퍼져오르는 것처럼 한결같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대한 비젼을 배운다

헬렌 로즈비어를 통해서 여성으로 감당하기에는 가장 큰 시련, 수치, 치욕스런 아픔까지도 극복하고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도리어 사용하는 상처받은 치유자의 성숙함과 집념을 배운다

메리 슬레서를 통해서 선교사의 심플 라이프 스타일을 배운다. 영원한 주의 나라에 가기전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명령에 충실하려고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려가는 영적 전사의 거룩한 목표와 삶을 배운다

봅 피어스와 선명회를 통해서 말과 혀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참 믿음의 본질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