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머무시며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예수님은 오랜 시간을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30세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기간은 3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기간을 우리는 ‘공생애’라 부릅니다.

예수님에게 3년의 시간은 평범한 우리의 삶이 평생 감당해야 할 일보다 더 위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이 사역의 시간 동안 가르치신 내용 중에 ‘산상수훈’으로 불리는 ‘천국시민의 강령’은 우리가 이 땅 위에 살아가면서 어떻게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팔복’의 내용은 인생이 ‘천국의 복’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의 자녀라 불리는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니 보는 것부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몸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마음과 눈은 천국과 영원을 대망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몸에 잘 훈련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의 누리는 모든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라면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진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시며 진정한 인생의 모델이 되어 주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몇 주에 걸쳐 이 ‘팔복’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삶이 현재는 이 땅 위에 있지만 어떻게 천국을 바라보며 세상을 누리며 살 수 있는가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팔복의 시작을 ‘가난한 자’에 국한 시켜 말씀합니다. 분명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아무나,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택하신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택하신 백성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온 인류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택하신 백성들의 첫 조건으로 ‘가난한 자’들이라고 규정하고 계십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행하신 첫 설교문에서도 자신이 이 땅 위에 오신 목적을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이사야 61장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의 소지를 제거하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는 현세에서 ‘물질적인 가난’을 경험하고 있는 자들로 규정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이 가난한 자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의 포로기에서도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 나타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는 분명 외적으로부터 ‘고난’과 ‘억압’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회적으로 억압받거나, 불의의 세력에 고통 받고 있는 자, 혹은 자신의 유익이나 영향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처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만으로 끝나는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나라로부터 오는 구원을 대망하는 사람들을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뚱맞은 이야기 같습니다만 ‘몇 일을 굶은 사람에게 가장 시급하고 간절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아마도 빵일 것입니다. 그들은 빵을 기대하고 그것 얻기를 간절히 갈구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사람마다, 처한 환경마다 다르겠지만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악을 악으로 갚거나, 불의를 불의한 방법으로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는 사람들이 ‘가난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만족감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굵은 밧줄은 바늘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꼬인 밧줄을 풀어 가느다란 씨줄로 만든다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건 부유하건, 신분이 높건 낮건 그것이 ‘가난한 자’를 규정하는 잦대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땅 위에 눈에 보이는 것들로 가득 자신을 뭉쳐 놓으려고 하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분의 마음이 간절함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가난한 자의 심령’이 되어 지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