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교회력으로 종려주일 (Palm Sunday) 이자 고난주일 (Passion Sunday) 입니다. 부활절까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는 절기로는 고난주일이고, 만왕의 왕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환영했던 것을 기념하는 날로서는 종려주일인 것입니다.

“호산나”의 뜻은 “구원하소서!” 입니다. 이 분일까 저 지도자가 그 분일까 하면서, 늘 메시아를 기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메시아적 기대를 가지고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 환영의 외침은 며칠 후에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는 실망과 저주의 함성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에 울려 퍼진 “호산나”의 함성이, 만왕의 왕을 향한 변치 않는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힘없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우리의 기대를 배신한 사람이라고 돌을 던질 사람들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 준 겸손의 종을 바로 깨닫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11장의 기록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주님의 모습과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주님은 겸손의 종입니다. 나귀는 말과 비교할 때 지극히 볼품이 없는 짐승입니다. 늠름한 모양이 전혀 없습니다. 나귀는 그저 가난한 촌의 가정에서 물건을 대신 나르게 하는 짐승일 뿐입니다. 왜 주님은 나귀를 탔을까요? 왜 초라한 행렬로 구원의 클라이막스의 장소에 들어 오셨을까요? 이미 예언된 대로 겸손의 종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9:9). 세상의 왕과는 다른 지극히 겸손한 모습의 왕, 그러나 동시에 심판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고대의 왕들은 위엄과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가장 좋은 말을 탔습니다. 키가 크고 화려하고 늠름한 말은 왕의 얼굴입니다. 왕은 가장 위엄있는 말을 타야 마땅합니다. 오늘날의 통치자들은 최고의 권세가 있어 보이는 의전용 차를 타게 되어 있습니다. 눈부신 검은색 벤츠나 캐딜락은 두려움을 자아 냅니다. 그 속에 탄 사람도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대통령이 코롤라 중고를 타고 행사장에 나타났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 위엄도 느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연약한 나귀를 타시고, 십자가의 길로 들어 서셨습니다.

둘째,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겸손의 종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과 애꿋은 무화과 나무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시장하셨던 주님은 무화과 나무의 열매의 싹을 찾아 보셨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먹을 열매가 없다고 홧김에 저주할 수 있을까요? 이 무화과 나무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신 열매를 영영 맺지 못하고, 곧 멸망당할 운명의 예루살렘의 운명을 가리킨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셋째, 그리고 예수께서는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보니, 팔고 사고 하는 매매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을 상대로 돈을 바꿔 주고, 제물로 쓸 동물을 파는 거래가 활발했습니다. 이 일들은 본래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 편하게 제사를 드리도록 환전도 해 주고, 불편하게 끌고 올 필요없이 짐승을 거기서 사면 되도록 편리를 봐 주는 장사들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제사보다 제사밥에 더 관심이 가게 되어 버렸습니다. 예배보다 장사와 돈을 버는 일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행위를 비호하는 성전종교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분노하신 예수님은 장사판을 뒤집어 엎은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고 분노하셨습니다. 형식만 남은 종교를 심판하시고 자신의 몸을 통하여 참 예배를 세우셨습니다.

종려주일에 우리는 나귀 타신 겸손한 메시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힘없이 끝난 분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주였습니다. 열매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시고, 예배의 정신은 사라지고 사람의 계산과 이권에 대한 욕심으로 눈이 흐려진 종교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가장 연약한 모습이지만, 그 십자가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고전 1:23)”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