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뉴욕 주지사의 스캔들이 미국 사회를 강타했습니다. 미래의 대통령 감으로 촉망받던 젊은 인재가 권력의 정상으로부터 추하게 추락했습니다. 이 뉴스가 특별히 충격적인 이유는 그가 매춘조직을 소탕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매춘조직을 소탕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 최고급 매춘조직의 회원이 되어 더러운 욕망을 쏟아 냈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아연해 하는 것입니다. 주지사직에서 사임한다는 발표를 하러 나온 그 사람의 옆에 서 있던 부인의 초췌한 모습이 마음을 아리게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법대 교수 한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논평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서방 국가 중에서 개인의 사생활에 이토록 집착하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고 답답해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이라면 유럽 국가에서는 얼마든지 양해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인해 스피처같은 능력 있는 인물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은 국가적인 손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제는 미국도 이같이 공인의 사생활에 집착하는 병적 현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저는 그의 논평에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대통령이 최근에 보여준 행동을 보면, 프랑스 국민들이 미국 국민보다 훨씬 사생활 문제에 대해 너그럽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고 옳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너무 보수적인 탓일까요? 자기 아내를 속이고 부정한 쾌락을 은밀히 즐기고 있는 사람이라도 능력만 좋으면 공직에 그대로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을까요? 가장 가까운 아내를 속인 사람이 국민을 제대로 섬길 수 있을까요?

이런 논리라면 머지 안아 “목사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살든 관심하지 않겠다. 설교만 잘 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기만 하면 그런 것은 묵인할 수 있다.”는 논리가 나올 법도 합니다. 실제로, 스캔들을 일으키고 나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변호하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는 바울의 말씀을 사용하여 자신의 죄를 변호하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햇볕을 가리려는 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일을 보면서,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을 생각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의 지적, 영적 자만에 대해 경고하면서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스피처 주지사를 잘 아는 사람이 방송에 나와, “아마도 그 친구가 권력의 정상에서 공허감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언제나, 유혹은 “이만하면 됐다. 이젠 충분하다. 이제는 탄탄대로다.”라고 생각할 때 찾아옵니다. 다윗 왕이 충신의 아내 밧세바에게 눈길을 돌린 것은 전성기를 달릴 때의 일이었습니다.

만사가 잘 될 때 기고만장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인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어느 면으로든지 넘어지지 않도록 늘 스스로를 살피며 살아가십시다. 넘어짐을 피하기 위해 마음을 살피되, 나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그리하도록, 그분 앞에 서는 일에 게으르지 맙시다. 주님의 자비가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