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빌라도의 회상’이라는 일인칭 설교를 들으실 것입니다. 작년 이맘 때 ‘가룟 유다의 고백’이라는 일인칭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를 처음 방문하신 분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 한참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세례를 받고 한국으로 가셨습니다. 이번에도 두 편의 일인칭 설교를 통해 성령께서 누군가의 마음을 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인칭 설교 형식에 대해 생소하게 느끼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실은, 저도 이 일을 실행하는 데 큰 용기를 내야 했습니다. 작년에 처음 시도할 때, 많이 주저하고 망설였습니다. 심각하게 기도하면서 재고 또 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고민하는 가운데 ‘한 번 해 보자’는 믿음이 들어서 시도했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일인칭 설교를 시도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요한복음의 성격 때문입니다. 다른 세 복음서(이 셋을 ‘공관복음서’라고 부릅니다)와 비교해 요한복음은 여러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과 한 개인의 만남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단어와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비평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복음서가 요한복음입니다.

저자가 예수님과 한 개인의 만남에 이렇게 정성을 들인 까닭은 그 이야기를 통해 독자가 예수님과 만나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진실한 만남은 ‘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분의 초청에 응답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의 선택으로 몰아세웁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회중을, 등장인물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도전 앞에 세울 책임이 있습니다.

빌라도의 재판 이야기를 두고 고민하면서 저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회중으로 하여금 빌라도가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빌라도가 대면했던 예수님의 도전을 회중에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 끝에 일인칭 설교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런 식으로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이런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의도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본문 안에 배치해 놓은 문학적인 상징과 암시를 이렇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맥 빠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반대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가 본문 안에 배치해 둔 문학적 상징과 암시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회상’의 경우, 요세푸스가 남긴 역사 기록과 요한복음 본문에 대한 문학 비평을 근거로 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꾸며 넣은 이야기도 없지 않지만, 설교의 줄거리와 방향은 저자가 의도한 것에 일치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성령께서 이 두 편의 설교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