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사회학자인 퇴니스(Ferdinand Tonnies, 1855-1936)는 그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Gemeinschaft und Gesellschaft)에서 "공동체"가 과연 무엇인가를 정의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유대관계는 언제나 "자연의지와 합리의지"에 따라서 공동체로 발생하게 되는데, "자연의지"는 "게마인샤프트"를 가능케 하고 "합리의지"는 "게젤샤프트"를 발생케 한다는 것이다. 즉 가족, 친지, 친구와 같이 혈통과 우정으로 엮어진 공동체는 "게마인샤프트"요, 관료 질서적 관계나 거래 타산적 유대관계에 의한 공동체는 "게젤샤프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다 신앙(信仰) 안에서 "우리" 의식으로 만나서 공동체를 꾸며 가는 정녕, "게마인샤프트"임이 분명하다. 교회는 곧 공통된 신앙의 신념과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모여 있는 일정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예배 또는 친교"를 드리고 나눔으로 "하나 됨"을 확인하곤 한다. 그래서 교회는 내세적으로는 "저 천국의 소망"뿐 아니라, 현세적으로는 이 땅위에서도 어떤 원칙적이고도 일정한 "도덕적 행동과 삶"을 지향하는 집단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러한 "게마인샤프트"적 성격을 띠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자칫 본연의 아름다운 정체성으로부터 탈선하고 있다는 지탄의 목소리가 높아만 가고 있다. 내면적으로는 교회와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져 경건의 모양만 지닌 채, 물량주의와 세속주의에 함몰되어 가고 있다는 탄식이 있다.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과거 한국의 근대화와 같은 사회 변화의 영향을 받아서, "성장 제일주의 개발철학"에 입각한 개 교회의 확장이나 가지치기 등으로 그 세(勢) 만을 확대해 왔다. 이런 세 확장의 시도로 말미암아 교회는 자연히 신앙생활을 단순한 "수와 양"에 초점을 맞추는 "개교회주의"나 "교파주의"를 강화하는 오류를 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성장이론"이나 "성장철학"으로 단순히 개 교회 또는 교세의 확장을 위해 남달리 특정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인적 자본과 재정 능력을 과감히 투자함으로써 공격적 경영을 감행하는 교회의 기업체적 성격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과 분쟁의 심화가 교계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한 게다. 이 땅의 모든 빈자(貧者)들이나 약한 자들과 참된 이웃이 되어 섬김의 사명을 다해야만 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닮아, 세상을 흉내 내는 꼴이 되고 만 게다.

가령 소위 "대형교회"라 불리는 집단들은, 자신들의 인적 자본과 재정능력을 내세워서 교회가 포화 상태인 곳에서조차 지 교회를 개척하여서 자본주의 상업적 사회 구조를 그래도 흉내 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교회가 순수한 "게마인샤프트"적 특징을 지양하고 "게젤샤프트"를 지향하는데서 비롯된, 참으로 심각한 문제의 단면이다. "게젤샤프트"적 교회는 언제나 "물량주의"적 가치관에 빠져서 대체로 작은 것들은 경시하는 반면, 큰 것들만을 추구하는 물질 지향적인 세속가치들이 교회 안에 만연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교회가 "비즈니스 마인드"에 의해 움직일 뿐 아니라, 세속가치에 따라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모습을 띄기도 하는 것이다. 더구나, "수평이동"에 의한 교인 쟁탈전이 벌어지는가 하면, 교인들을 빼앗기 위해서라면 온갖 "이벤트"성 비 신앙적, 비 복음적 수단들이 총 동원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복음의 상품화"도 등장하는데, 교회가 마치 무슨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상술을 다 발휘하는 세속적 사업처럼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교회들은 지역은 물론 지구촌을 향하여 "복음화"(Evangelization)라는 미명 하에 참으로 교회가 간과할 수 없는 더 중요한 것을 잊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교회의 최대 관심사는 "인간화"(Humanization)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양육되고 훈련받아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서 살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되어 "인간화"가 오히려 "복음화"를 위한 수단정도가 되고 있다는 비극이다. 더구나 교회가 전체 사회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책임에는 회피하거나 방관하면서 "기존의 질서" 안에서 기껏해야 "일회성" 구제나 "과시성" 사회봉사 등의 소극적 태도만을 견지한다면,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게마인샤프트"가 세속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신랄한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특별히 "게마인샤프트"적 교회 공동체는 늘 "개교회주의"를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개교회주의"란 개 교회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자신들 개 교회만의 발전이나, 기껏해야 자신들과 관련된 교파나 교단 등의 교세 확장에만 사용하는 경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교회들은 단적으로 교회가 가장 먼저 정립해야만 할 선교에 대한 개념 정리가 아직 미숙한 상태이거나, 또한 대(對) 사회를 향한 교회의 지도력의 향방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래서 이미 존재하는 기존 사회질서에 타협하고 안주하면서, 그 안에서 문어발식 기업주의적 교회의 확장만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대형교회들의 병폐적인 양상이다.

교회는 "늘 깨어서" 교회 본연의 모습을 지키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교회는 "게젤샤프트"가 아닌 "게마인샤프트"이기에 교회가 본질적으로 추구해야할 "섬김과 나눔"의 역할 등을 잘 감당할 뿐만 아니라, 개 교회 자신들의 "앞"이 아닌 자신들의 "옆"도 심사숙고하며 돌아 볼 줄 알아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교회가 기존의 사회구조 안에서 특정한 정치 세력이나 토호세력들과 결탁한 수구세력으로 남아서 과시적이고도 지엽적인 문제에만 대처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숙고하는 일도 중요하다. 교회는 정녕, 심각한 정체성의 문제에서 난관에 부딪히거나 교회가 본질적으로 추구해야하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대 명제를 망각하게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그 고유의 본질과 기능은 자체 교회의 이해 실현만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이 함께 협력하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인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