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일이란 쉽지 않은 듯합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시고 참 많이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류가 타락하고 수습이 어려워지자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열어 돕기로 작정하십니다. 그것이 창세기 7장에 등장하는 홍수사건이었습니다.

홍수사건은 그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로 물든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목적 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다시 노아 가족을 통해 천지 창조 후 인류에게 주셨던 축복의 말씀을 다시 동일하게 명하신지 모릅니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노아 가족에서도 문제와 죄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새끼를 치고 있습니다.

변화의 기회, 축복의 기회를 주어도 다 누리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기에 지금도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 보는 것이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원래 인생이 그러니 주변 돌아 볼 필요 없이 자기만 생각하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좀더 지혜롭게 준비된다면 훨씬 그 효과는 아름답고 풍성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바울이라는 사도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와 헬라’로 갑니다. 복음을 듣고 생명을 건지고, 육신의 치료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도 바울과 그 일행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무리도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한 도시(이고니온)에서는 이런 그들을 돌로 쳐 실신 시키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바울 일행은 가는 곳마다 먼저 하는 일은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대단한 열정 때문인지 ‘베뢰아’라고 하는 도시에서는 참 ‘신사적인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에게 도 동일한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 중에는 바울의 말을 듣고 수 많은 사람들, 심지어 그리스의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변화되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기 까지 그들은 매우 신사적이었다는 칭찬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여느곳과 다르게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

다른 곳에서는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없지만 단순히 그들이 ‘신사적(紳士的)’이었다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도움을 받고, 도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신사적’이라는 말의 원 뜻은 헬라어로 ‘고귀한’ ‘고결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open-minded’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품행이 바르고 수준 높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교양 있는 교육을 많이 받아서라기 보다 ‘넓은 마음’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돌아볼 줄 아는 모습에서 불려 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삶을 살았기에, 그들을 돕기 위해 위험 중에도 찾아온 바울을 이해하고, 그의 말을 잘 듣고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런 ‘신사적인’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물이나 대상을 색안경 끼고 보는 습관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호의를 가지고 대해도 그 이면에 ‘어떤 저의가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 너무 불안한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마음에 가득하니 도움을 구하기도 어렵고 돕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것저것 따지며 사람을 대하기 보다 베뢰아 사람들과 같은 ‘고귀하고’ ‘열린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이 진정한 열매로 나타나길 원한다면 그 도움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며, 얻은 도움을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가지 못하기에 도움을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왜 도움을 주고도 찜찜하고, 받고도 찜찜합니까 ?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도움의 기회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후회하시게 살았습니다. 현재 우리들도 도움을 기대하고 기다리면서도 그 도움을 받고 누릴 준비를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내 삶이 어떤 모습이든, 과거에 어찌 살았든 한 번 닫친 마음을 열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신사적이고 고귀한 삶’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아니 오히려 바울을 죽이기 위해 자신들의 생업을 포기하고 따라다닌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 좋은 것도 좋게 보일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십니까 ? 아니면 주변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까 ? 그렇다면 먼저 여러분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도록 ‘open-minded’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도움을 지키기 위하여 날마다 살피고 행하실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 웃으며 진정한 ‘도움’의 의미를 맛보고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