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제22차 세계철학대회(World Congress of Philosophy·WCP 2008)가 올해 서울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국제철학연맹과 한국철학회가 공동 주최하는 이번 세계철학대회는 오는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전 세계 150여 개국에서 3000여명의 철학자가 서울에 모여 21세기 지구촌의 현안과 미래에 관해 함께 의견을 모으는데 이번 서울 대회의 주제는 ‘오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Philosophy Today)’라고 합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세계 최대 규모의 철학대회가 아시아에서 열리기는 서울이 처음이라고 하는데 5년마다 각국을 돌며 개최하는 세계철학대회의 1차 대회는 지난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므로 시작되어 지난 2003년에 터키 이스탄불에서 모인 21차 대회 총회에서 22차 개최지를 서울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때 차기 주최국을 놓고 한국과 경합을 벌인 나라가 그리스였는데 서양철학의 발상지인 그리스 보다 먼저 한국이 세계철학대회를 개최하는 셈이 된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는 존폐가 거론될 만큼 인기는커녕 무시당한 인문학 분야에서, 그것도 가장 덜 대중적이라는 철학을 주제로 이만한 규모의 행사가 열리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기에 이번 대회가 갖는 의미는 여러 면에서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철학회 소흥렬 전 회장은 “한국의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계의 많은 문제점들이 ‘철학의 빈곤’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철학계는 이에 대해 그동안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철학계의 반성을 촉구하고 이번 대회를 통해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철학이 “생각의 힘”으로서의 그 자리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를 피력했습니다. 이번 대회에는 세계적인 저명한 철학자들이 대거 참석하는데 특별히 아시아에서 모이는 대회 인만큼 아시아 철학과 철학자들에 대한 비중이 그 어느 대회 때보다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이번 대회를 앞두고 모 신문사에서 기획한 “세계적 철학자 7명과의 인터뷰”에 4명이 아시아 철학자인 것도 그 일맥이라고 보여 집니다.

오늘은 그 분들 중에서 중국 베이징대학교 교수이신 탕이지에(湯一介·81)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를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이 분은 중국 전통 철학의 현대화를 주창해온 대표적인 학자로서 현재 중국 교육부가 야심차게 진행하고 있는 국가사업 ‘유장(儒藏)’ 편찬의 총책임자이신데 유장이란 불교의 팔만대장경과 도교의 도교대장경과 같은, ‘유교대장경’을 말합니다. 유불도 삼교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병행해온 그는 유불도 가운데 어느 한 전공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 전통적 중국 철학의 특징이라고 하면서 중국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정신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꼽았습니다.

“화이부동”이란 “논어”의 ‘자로(子路)’편에 나온 말로서 “군자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것들끼리의 조화를 도모하는데, 소인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엇이나 같게 만들거나 혹은 같아지려고 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는 데서 나온 말인데 탕이지에 교수는 “중국 철학 정신의 핵심적인 방법이 바로 ”화이부동“이라고 하면서, 중국 고전 가운데 하나인 ”국어(國語)“에 나오는 ”다른 것들끼리 만나서 조화를 이루고 협조하면 만사 만물이 번창하지만, 차이를 말살하고 동일하게 해버리면 지속되지 못한다(和實生物, 同則不繼)“는 말로 그 의미를 다져 주었습니다.

탕이지에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화이부동, 즉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룬다”는 이 말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정하신 하나님의 질서의 원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을 지으실 때 모든 것을 다르게 지으시며 서로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 살면서 다른 것들과는 함께 더불어 보듬으며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바로 이 “화이부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민족은 역사적으로 우리와 다른 것들과 공존하거나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살아온 기회가 적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와 다른 민족들로부터 침략을 당한 아픈 기억들이 민족의 역사 속에 깊이 배겨 있어서 우리에게 “다름”이란 우리가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거나 배척하고 물리쳐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면 으레 먼저 “다름이 아니오라”라는 수식어를 전제하고 시작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해 거의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인해, 나와 “같음”에는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면서 나와 “다름”에 대해서는 마치 태생적 배타감정을 가진 듯 거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화이부동”보다는 “동이부화(同而不和)”에 더 익숙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두 다르게 지으신 후 좋아하시고 축복하신 것이 창조의 원칙이라면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서로 다름의 조화를 이루며 살라는 “화이부동”은 더욱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새겨야할 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