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교인과 현대 교인의 다른 점이 있다. (옛날 교인이라는 단어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연로하신 분들로서 오래 전에 교회 생활 하신 세대를 말한다.) 많이 달라진 것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목사님을 어려워 하는 것이 아닐까? 듣거나 자서전을 읽어보면 목사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을 정도로 존경하였던것 같다. 요즘은 목사님을 직업인으로 생각하는 면이 강해 존경하는 부분에서는 농도가 떨어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은 것도 있는것 같다. 이 경우는 순전히 나 자신의 짧은 신앙 생활을 바탕으로 추측한 것이다. 그것은 궁금한 것에 대한 질문이다.

일반 성도를 보면 목사님께 질문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이 거의 구별되어 있다. 이것이 정형화를 지나 화석화 되어 있다.

보통, 일반 성도가 질문을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십일조를 세금 공제 전에 하는 겁니까? 아니면 세금 공제 후에 하는 것이 좋습니까?”
“금식은 몇일 간 하는 것이 좋습니까?”
“조금 마시는 술도 나쁜 것입니까?”
“교회를 모를 때 세례 받았는데 다시 받아도 됩니까?”
“침례와 세례가 다릅니까”
“개신교끼리 왜 싸움니까?”
“초신자인데 성경은 어디서부터 읽는 것이 좋습니까?” 등일 것이다.

반면에 일반 성도가 정말 궁금한 것, 그러나 목사님께 여쭙지 않는 것이 있다.
동성애에 관한 것, UFO에 관한 것, 성경 속의 홍수에 관한 것, 성경이 과학 책인지? 역사 책인지?, 공룡에 관한 것, 화석에 관한 것, “노아의 방주가 진짜인가?” 짧은 인류역사에 관한 것(약 7000년), 창세기 내용은 실역사인가?, 오파츠(OOPARTS)에 관한 것, 신문에 난 진화론의 증거에 관한 것 등.

질문을 해서 궁금점을 풀고 싶으나, 오히려 난처해 하시거나 답을 잘 못하실 것을 미리 염두에 둔 바른 예절 때문에 안하는 것이다.

“그들은 감히 예수께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였다”(누가 20:40)
“솔로몬은 여왕의 질문에 하나도 막히지 않고 다 대답해 주었다.”(역대기하 9:2)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예레미아 12:1)

성경에는 질문에 관한 기록이 많이 있다. 비록 세분화, 전문화 된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어 성경이 기록되었던 시대와는 질문의 내용과 단어가 다를지라도 질문에 대해 시원히 해답을 주지 않는 것이 없다. 특히 성경에서 질문을 금지하는 구절은 없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는 “왜?”라는 질문이 없다. 이전에 질문을 해 봤던 평신도들의 뼈아픈 역사가 쌓였기 때문은 아닐까?

위에서 언급한 질문의 내용과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성서적 창조론이나 과학적 창조론을 통해 해답을 줄 수 있고, 과학적 증거들을 들어 진화론의 주장이 허구임을 알려줄 수 있다. 창조과학회원의 높은 참여도와 증가하는 지지도는 창조과학회에서 선포하는 내용들이 바로 그동안 교인들이 궁금했지만 공개적으로 질문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들어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베드로 전서 3:15)

교회는 성경의 기록대로 창조의 사실과 증거에 관한 이유를 들어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 있었으면 한다. 현재 개 교회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창조과학회에 연락해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그 곳은 창조와 진화에 대한 질문에 이미 예비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www.Ark353.com)